[Review] 우리의 섬에는 다리가 놓여야 한다 - 음악극 [섬: 193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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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부터 7월 7일까지, 국립정동극장에서 음악극 [섬: 1933~2019]가 상영된다. 그 덕분에 오랜만에 종로를 찾았다. 드넓은 서울에서도 종로의 분위기만큼은 유독 특별하다. 혁신의 도시 서울에서 우리는 더 빠르고 더 새롭고 더 진취적일 것을 요구받지만, 종로는 그와 달리 '옛날'을 상상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종로 거리에는 곳곳에 왕궁과 유적지 터가 남아 있다. 돌담길을 따라 박물관을 산책하고, 투박한 궁서체 간판을 내건 허름한 맛집을 찾아가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도 결국 과거로부터 드리워진 긴 다리로 연결되어 있음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섬: 1933~2019]는 종로의 그런 면과 꼭 맞아떨어지는 극이었다. 1933년, 1966년, 그리고 2019년. 세 세대를 이어 주는 '섬'이라는 테마는 소록도 한센인들의 삶과 서울 발달장애 아동 가족의 삶을 이어 주는 징검다리다.
1933년,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로 강제로 이주당한다. 차별과 멸시의 시선 속에서 부랑 생활을 이어가던 환자들은, 바다만 건너면 '유토피아'에 갈 수 있다는 소문을 굳게 믿고 제 발로 소록도로 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기다리던 건 강제 노역, 감금, 그리고 해부라는 참혹한 현실이었다. 백수선과 박해봉의 사랑을 통해, 그런 현실을 이겨낼 수 있던 유일한 희망이 환자들 간 사랑, 우정, 연대를 통한 따뜻한 마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66년,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해방 이후에도 소록도에 격리되어 살아가는 환자들에게 매일 아침 따스한 우유 한 잔과 함께 따뜻한 격려를 보낸다. '한센병은 낫는다'는 확언으로 40년을 환자들 곁에서 봉사하다가,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을 때 그들은 모든 흔적을 불태우고서 섬을 떠난다.
2019년, 고지선은 발달장애 아동의 어머니로서 아이의 교육과 돌봄에 최선을 다하지만, 매번 제도와 인식의 냉담한 얼굴에 부딪힌다. 그러던 중, 특수학교 설립을 두고 첨예하게 갈등하던 장애인 학부모와 지역 주민 사이 찬반 토론회 개최되고, 그곳에서 고지선은 발달장애 아동과 그 보호자들이 숨어 들어가는 '장애도'에 대해 소리 높여 이야기한다.
이 글에서는 극을 관람하며 발견한 몇 가지 감상 포인트를 키워드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섬, 천, 일인다역, '우리'라는 키워드를 통해, [섬: 1933~2019]가 그려내는 따뜻한 희망과 연대의 세계관을 들여다보자.
#1. 섬
세 시점의 이야기를 묶어 내는 테마 '섬'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왔고 지금도 그러한 '배제의 논리'를 뜻한다. 1933년과 1966년을 이어 주는 주제는 '한센병'과 '소록도'로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2019년과의 연결고리는, 마지막 토론회에서 고지선이 '장애도'를 대사로써 직접 언급한 이후부터 확실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제야 뚜렷해진다. 남들과 다른 누군가를 섬으로 보내 떨어뜨리는 격리는 옛날 옛적의 전근대적인 역사에서 멈추지 않았으며, 물리적인 강제 이주가 동반되지 않더라도 차별과 멸시의 시선이 사회적 약자를 마음의 섬에 고립되도록 만든다는 사실이.
한센병은 낫는다. 발달장애인을 본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단 1분만 지나더라도 금방 익숙해진다. 그러니까 이들은 해악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격리된 것이 아니라, 격리되었기 때문에 악마화되고 비인간화된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다름'을 대하는 태도는 배제의 논리에 기반해 있으며, 이 과정에서 '다름'을 해로운 바이러스처럼 취급하고 멸시하는 시선이 동반된다. 한센병 환자들이 섬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도, 발달장애 아동의 학부모가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야 했던 이유도, 사실 물리적인 고통보다도 그들을 바라보는 따가운 눈초리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선은 그들을 머나먼 섬으로 보내 격리하고, 그들이 없는 사회가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고 무결한 세상이라는 착각 속에 빠뜨린다. 그러나 세상은 '무결'을 추구할 수 있을 만큼 동질적이지 않다.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더 많은 '불순분자'와 '바이러스'들이 섬에 봉쇄된다. 어쩌면 '나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에 안심하던 이들이 모두 쫓겨나서, 결국에는 그 누구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이 과정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던 때의 기억들이 생생하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기침 한 번이라도 하면 모두가 '홱' 하고 째려보는 바람에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듯 눈치를 봐야만 했다. 옮을지도 모르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계의 눈초리, 어디서 뭘 하고 다녔길래 바이러스를 옮아 왔느냐는 멸시의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그런가 하면 환자들은 확진 후 일주일간 자택에 격리되어 사회로부터 극단적인 거리두기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격리는 곧 새로운 문제들을 불러일으켰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피해 아동, 집에 냉난방 시설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에너지 취약계층, 우울증 환자들에게 집은 안락한 휴식의 장소가 아니었으며 이들을 폭력의 굴레에 봉쇄시키는 장치로 작용했다. 이처럼 배제의 논리는 끝없이 재생산되고 있으며, 격리된 섬은 유토피아가 아닌 막다른 골목일 뿐이다.
#2. 천
극 전반에서 눈에 띄는 소품은 단연 배우들이 한 번도 손에서 놓은 적 없는 '천'이다. 천은 한센병 환자들이 곪은 살을 감싸 두르던 붕대를 연상케 한다. 소록도에 가 보면 성당 십자가에 붕대가 감겨 있는데, 그만큼 붕대는 한센병 환자들의 아픔을 상징하는 소재로 오랫동안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극은 한센인을 상징하는 붕대를 다양한 의미로 변주하여 보여준다. 막 태어난 아기의 포대기로 탄생을, 육체가 실려 나가는 자루로 죽음을, 마가렛과 마리안느가 건네주는 우유로 희망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천'이 드러내는 한센인의 모습은 고통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생과 사 그리고 희망을 넘나드는 역동적인 삶을 통해 드러난다. 한센인을 고통받는 수동적 객체로만 상징하던 기존의 상징 '붕대'가 이들의 다채로운 삶을 그려냄으로써, 극에서 한센인은 비로소 적극적인 주체로 표현된다.
#3. 일인다역
이 극의 특이한 점은, 무대에 오르는 배우는 12인이지만 이들이 그려내는 인물은 30여 명에 달한다는 일인다역이다. 마리안느는 고지선이 되고 마가렛은 백수선이 된다. 나이 든 해설자는 회상을 통해 바다 건너 어머니를 부르는 어린아이가 된다. 이는 단순한 연출 장치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너머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란문화재단
바로 인간의 입체성을 드러내는 장치라는 생각이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소록도를 떠나기 전 말한다. 많은 것들이 변했으며, 이제 도움을 받던 나라는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다고. 그리고 그 자신들은 도움을 주던 젊은 봉사자에서 도움이 필요한 노인이 되어 섬을 떠난다.
이들처럼, 인간은 필연적으로 일인다역을 맡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돌봄을 받는 존재로 태어나, 돌봄을 주는 존재로 성장하고, 다시 돌봄을 받으며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영원히 강자의 위치에 머물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취약하게 태어나 언젠가는 다시 취약해지기 마련이므로, 당장 타인의 취약성을 멸시하기보다는 나와 관련된 문제로 여기고 연대할 필요가 있음이, 일인다역의 연출을 통해 드러난다.
#4. '우리'
ⓒ우란문화재단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아이의 발달장애를 진단받은 뒤, 고지선은 남편에게 묻는다.
"나 잘할 수 있을까?"
그는 대답한다.
"우리."
이처럼 극이 채택하는 시점은 일인칭 복수다. 한센인들의 아픔과 발달장애인 가족의 고충은 그저 몇몇 소수의 문제만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인간은 약하고 또 서로 다르게 태어난 존재로서, 소록도와 장애도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의제다.
그러므로, 이제는 각자 마음속에 있는 섬에 다리를 놓아 '우리'의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때다. 백수선이 고지선에게 세대를 거슬러 전하는 메시지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였다. 만약에 안 되면,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라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좇으며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은 바로 주어가 '나'가 아닌 '우리'라는 연대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섬: 1933~2019]가 연극이라는 형식을 채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연극은 관객에게 동일한 체험을 겪게 함으로써 '우리됨'의 기회를 선사한다.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주변을 둘러보니 관객들 거의 대부분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국인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다들 우는 모습을 드러내는 데 참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가만히 참다가, 불이 꺼지고 장면이 전환될 때 그제야 코를 훌쩍이고 옷소매로 눈물을 닦는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불이 들어오면 각자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을 가리느라 어색해지지만, 불이 꺼지고 함께 눈물을 닦던 '우리됨'의 경험은 극장 밖을 나서서도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김채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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