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헬싱키 - 특별할 것 없는, 그래서 더 특별한 [여행]

마이너에 대한 고찰 13
글 입력 2019.05.2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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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인적인 여행 취향은 이러하다. 최대한 한 동네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고, 이곳만은 꼭 가야 한다는 랜드마크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그곳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그들이 추천하는 어딘가는 꼭 가보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나열했지만, 종합해보면 어느 숙박 플랫폼의 슬로건처럼 ‘살아보는’ 여행을 즐기는 듯하다.

이러한 내 취향 뒤편에는 해야 하는 것으로 가득 찬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왔는데, 또 해야 하는 무언가로 가득 채우는 게 싫은 마음이 있다. 또,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예상치 못한 발견을 사랑하는 나의 취향도 있다. 그런 탓이었을까, 여행을 다닌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나는 의외의 장소를 인생 여행지로 꼽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 이야기할 ‘헬싱키’이다.

지난 12월, 나는 헬싱키로 떠났다. 떠나기 전 이미 헬싱키를 가봤던 사람들은 한 나라의 수도치고는 작고, 그곳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뚜렷하지는 않아서 별로 기억에 남는 곳은 아니었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사실 나 또한 헬싱키 자체에 대한 호기심보다도 그곳에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공연이 있다는 것 때문에 가기로 결정한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기대감이 높지 않았다. 게다가 헬싱키 여행 1주일쯤 전, 북극으로 향하는 길에 이미 헬싱키를 하루쯤 들렀던지라 여행지에 대한 설렘은 더욱더 없었다. 흔히 말하는 여행 전의 기분은 거의 없는 채로 비행기에 올랐고, 그렇게 나의 헬싱키 여행은 시작됐다.



나를 따뜻하게 맞아준 호스트, K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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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여행은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덕분에 숙소도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구했는데, 어디든 잘 수만 있으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아무 곳이나 예약했다. 위치도 제대로 보지 않고 예약한 것치고는 헬싱키 중심가와 적당히 가까우면서도 주거지역이라 로컬들이 훨씬 많은 곳이었다.

내가 간 곳은 Klas라는 할아버지가 사는 곳의 방 한 칸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Klas 할아버지 딸의 환대를 받았다. 이튿날부터는 Klas 할아버지가 매일 아침 빵과 커피를 챙겨주고 여행지를 살펴주기도 했는데, 꼭 방학 때 할아버지 집에 와있는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 들어 행복했다. 지내는 동안 진짜 집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사용하라던 할아버지의 배려와 늘 푸근하게 미소 짓던 얼굴이 여전히 내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워낙 혼자만의 여행을 좋아하지만, 헬싱키 자체가 (개인적으로는) 고독함이 있는 도시라서 그 균형을 잘 잡지 않았다면 조금은 우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헬싱키 시내를 여행하는 동안은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외로움을 즐기는 시간을 보냈다면, 숙소로 돌아가면 포근하게 맞아주던 Klas 할아버지와 그 집이 있어서 적당히 고독하고 적당히 따뜻하게 3일을 보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가는 숙소일 테니 Klas 할아버지가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이 닿을 수 있다면 지금은 나로부터 꽤 먼 곳에 살고 있는 그에게 꼭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소소한 구경거리들로 가득한 빈티지 천국, 깔리오(Kallio)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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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튿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Kallio 지구로 갔다. Klas 할아버지에게 헬싱키 중심보다는 혼자 구경할 것이 많은 곳을 가고 싶다고 했더니 추천해줬던 곳이다. 빈티지 의류, LP, 소품 등 다양한 컨셉의 빈티지 샵들이 밀집해있고,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쇼룸과 샵들이 모여 있는 깔리오 지구는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헬싱키에서 꽤나 ‘힙한’ 곳으로 통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어디를 갈지 미리 지도에 찍고 가기보다는 발길 닿는 대로 걸었는데, 흥미로운 곳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건 의류만 수집하고 판매하는 상점, 꼭 중세 시대에 나올 것 같은 옷이 즐비한 빈티지 샵, 온 벽면이 오래된 책으로 가득 찬 고서적 서점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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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기억에 남는 건 어느 디자이너 연합의 쇼룸이었다. 조그마한 상점 안에 구획을 나누어 여러 디자이너의 작품들을 팔고 있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고양이가 작가인 책이 있었다. 이 책을 기획한 디자이너는 이 책의 저자인 고양이 Maija(마야)가 자신보다도 오랫동안 헬싱키에 산 ‘로컬’이라고 소개했다. 알 수 없는 기호들과 문자들로 나열된 얇은 책이었지만, 그걸 제작하는 과정에서의 마야와 디자이너의 모습을 상상하고, 이 재치 있는 책을 보며 나와 같이 웃었을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이 책의 무게가 달리 느껴졌다.

단지 내용뿐만 아니라 그 외부의 무언가, 그다음을 상상하게 하는 책이라니, 신선하고 재치있었다. 그리고 헬싱키 여행객으로서의 내가 헬싱키의 로컬로서 그에 대한 작품들을 만드는 디자이너와 헬싱키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헬싱키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더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아주 깔끔하고 정제된 중심과는 달리 Kallio 지구는 조금 위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거리에 부랑자들과 무언가에 취한 사람들이 역 주변을 거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싱키에 오래 머무른 사람들의 개성이 담긴 공간들을 방문하고 싶다면 꼭 가봐야만 하는 곳이다.



조용하고 한산한 헬싱키만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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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여행은 그리 길지 않았다. 2박 3일 정도였으니까 여느 여행보다도 짧은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싱키에서 꼭 살아본 것만 같은 기억이 남아있는 건 그곳만의 한산하고 고요한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여름이 성수기인 북유럽 핀란드를 한겨울에 갔으니 거리의 추위와 고독감은 더 짙었다. 그런 헬싱키 거리를 목적 없이 걷고, 걷다가 마음이 가는 곳이 있으면 잠깐 머물렀다. 단지 이걸 반복했을 뿐인데 옷 사이로 스미던 헬싱키의 차가운 공기, 길을 가면서 봤던 사소한 것들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아마 정말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다녔던 여행이라 오롯이 나의 느낌에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 그런 것 같다.

가끔 우리는 쉽게 어떤 것의 본질을 잊고 살아간다. 왜 이렇게 바쁘게 생활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달리고 있는지. 이런 본질적인 질문들은 내가 하는 행위에 집중하면 할수록 내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완전히 길을 잃게 되면 그 행위는 자연히 의미가 없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일상도 그렇지만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의 추천으로 가득 찬 여행을 하다 보면 꼭 가야만 하는, 꼭 먹어야 하는 목록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렇게 오랜 시간 여행하다 보면 그 속에 나는 없고 행위들만 남는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지만, 어찌 됐든 어떤 방식으로든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하면서도 그 속에 있는 나를 잊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가장 많이 남는 것은 ‘내가’ 좋았던 것, ‘내가’ 느꼈던 것일 테니까.


[김윤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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