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니 홀저, 텍스트로 전하는 예술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5.1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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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홀저(Jenny Holzer, 1950- )는 '텍스트'를 주작업 재료로 사용하는 개념주의 예술가다. 옥외 광고판, 티셔츠, 포스터 등 일상 속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공간에 그의 텍스트가 있다. 마치 나이키의 'JUST DO IT'과 같이 지나치기 쉬운 단순한 광고같지만, 그의 언어는 친숙함과 동시에 비판적 성격이 내재되어 있다. 이 글은 홀저의 텍스트 속에 내재된 사회맥락적 의미와 그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대의 변혁 속에서 성장한 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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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유럽 등을 중심으로 한 서구 사회는 경제적 성장과 함께 정치적으로 보수화되었다. 미국에선 반(反)공산주의 구호를 외치고, 프랑스 사회당은 알제리 식민전쟁을 지지하고, 영국 노동당은 노동운동에 등을 돌리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백인/중산층/자본가'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이 풍요로움은 깨지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빈부격차·인종차별·성차별·전쟁 등 각종 사회 병폐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반전 여론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고, 기존의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반기로 나타난 68혁명은 유럽 사회에 평등·성해방·인권·생태주의 등의 가치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한편, 미술계에선 이른바 모더니즘 미학의 종언이 일어났다. 사회변혁으로 떠들썩한 세상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엄격한 형식주의는 타파해야 할 전통의 산물이었다. 예술가들은 2차원의 평면성을 넘어, 미니멀리즘·해프닝·플럭서스·팝아트 등 다양한 예술형식을 만들어냈다. 더 풍부한 언어를 만들어 내기 위해, 예술가들은 비디오·텍스트·드로잉·사진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관객에게 전달했다.



광장은, 생각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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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y Holzer, <Sign on a Truck>


제니 홀저는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주로 문자를 기반으로, 사회적 이슈나 삶의 문제를 담아낸 텍스트를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고했다. 그녀의 작업이 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만큼, 형태나 장소 또한 사람들이 자주 볼 수 있는 곳에 만들어졌다. 거리의 광고판, 티셔츠의 문구에도 그녀의 메시지가 그려졌고, LED 전광판 작업과 같은 대형 건물을 비롯하여 사진,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을 했다.

<Sign on a Truck>은 1984년 대통령 선거 전에 작업한 프로젝트는 그가 얼마나 사회에 대해 심도 깊은 고민을 하고, 주장이 아닌 제시라는 겸손한 방법을 택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트럭에 부착된 30피트의 대형 비디오 화면을 통해 미리 녹음된 인터뷰와 행인들의 생방송 인터뷰를 결합시켜 내보냄으로써 다수의 의견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을 보여준 작품이다. 언론은 시민의 인터뷰와 전문가의 논평을 들으며 선거 경향을 분석한다. 자칫 인터뷰하는 사람의 말이 대중적이고, 전문가의 논평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이는 언론이 정한 정치적 방향이다. 언론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통해 은밀하게 특정 정치인을 선전하는 역할을 한다.

홀저는 서로 상반되는 의견이 나오는 미디어를 제시하여, 한 쪽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던 시민을 붙잡는다. 이는 시민 자신이 정치인을 뽑을 때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행해야 함을 환기시키고, 이를 공적인 자리에서 토론할 수 있게 끔 유도한다.



공권력을 향한 정치적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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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y Holzer, <검열 회화(Redaction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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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y Holzer, <손바닥, 손가락, 손가락 끝 000407>


<검열 회화(Redaction Painting)>는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 정부 내에서 오고 간 메모와 편지들이다. 문서에는 어떠한 고문기술로 이라크 포로를 심문할 것인지 등을 담고 있다.  '사이비 전쟁'이라 불렸던 이라크 전쟁은 테러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됐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홀저는 문서 일부분을 검게 지워, 정부가 무엇을 은폐하고자 했는지 묻게 한다. 그리고 저 타이핑이 어떻게 현실 세계에서 잔인하게 발현되는지, 전쟁을 얼마나 가볍고도 관료적으로 생각되는 지를 묻는다.

<손바닥, 손가락, 손가락 끝 000407>는 이라크 전쟁 당시 구금 중 사망한 이들과 억류자들을 학대하여 기소된 미군의 지문을 채취하기 위해 손바닥을 잉크에 묻혀 찍은 문서를 사용한 작품이다. 뒤틀린 듯 찍힌 모양은 그가 한 고문 행위를 연상시키며 전쟁이 가져다 준 참혹한 결과를 암시한다. 검은 잉크로 선을 길게 그은 것은 익명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손바닥이 누구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



삶 옆에 있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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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y Holzer, <Protect me from What I Want>



홀저가 정치적 이슈를 주로 표현했다고 해서, 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홀저가 작업한 많은 메시지는 우리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그가 라스베이거스에 LED 사인을 설치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Protect me from What I Want> 프로젝트가 그렇다. 이 작품은 장소의 맥락과 함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자본주의로 얻어낸 부의 정점에 서 있는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는 소비, 오락, 광고, 쇼핑 등 대도시의 화려함을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서 홀저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달라는 경각심을 전달하며, 소비로 인간의 삶을 채우는 삶을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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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성을 살리는 장소-특정성이 강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특히나 큼지막한 텍스트를 대형 물체에 빛으로 쏘아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작품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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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저가 약 4개월 전까지 했던 이 프로젝트는 #onemancandestroy 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는 분명 말살라 유사프자이가 했던 말 "If one man can destroy everything, why can't one girl change?"을 떠올리게 한다. 이 말이 트럼프를 향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랄라가 그의 이민정책을 두고 비판한 것은 분명하다. 홀저의 작품 또한 트럼프의 무자비한 이민정책으로 인한 이민자의 두려움, 공포의 메시지가 드러난다. 미국 대도시 한가운데에 "KILL RATE", "REALLY I JUST DON'T WANT TO FUCKING DIE"라는 메시지를 보고 이를 떠올리지 않을 자가 있을까?

짧은 텍스트가 어떤 힘이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길을 지나가다가 어떤 글을 보고, 당신의 삶을 관통하는 듯한 메시지를 발견한 적이 없는가? 길을 가다 멈추게 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게 하는 것, 토론하게 하는 것. 홀저의 힘은 선전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한다는 데 있다. 그의 작업을 앞으로도 기대한다.





*
참고
오유진, 「제니 홀저의 텍스트 작업에 나타난 정치성」,
『현대미술사연구 31집』, 현대미술사학회, 2012, 223-263쪽


[이다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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