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뮤지컬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

디스토피아, 한국 문화 생태계의 독특한 외래종으로 자리 잡다.
글 입력 2019.03.2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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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밀양림은 과일조차 썩지 않는 최첨단 자연환경을 가진 세계로 사람이 사는 곳이지만, 사람이 운영하지 않는 곳이다. 자욱한 잿빛 속에서도 진짜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바깥세상에서 밀양림으로 돌아온 유울모는 바깥세상을 계속 회상한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미아보라. 미아보라는 유전자 테러로 인해 식물로 변해가고 그녀에게 '바깥세상'을 느낀 유울모는 사라진 그녀를 쫓는다. 그 과정에서 유울모는 밀양림을 파괴하려는 자들을 알게 되고 그런 그들을 파괴하려는 공안부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밀양림을 운영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서 살아갈 것인가? 밀양림은 정말 파괴될 것인가?


 

연극 연출가 겸 SF 작가로 활동하는 김진우의 SF 장편소설 <밀양림> (2013년 ‘소셜 포비아’란 제목으로 재간행)을 각색하여 만든 <나는 그녀를 왜 사랑하게 되었나>는 그동안 국내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SF 뮤지컬로 오는 3월 16일부터 31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공연한다.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는 과학문화 상품화 및 콘텐츠 산업의 지속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추진한 ‘과학스토리 기반 과학융합 콘텐츠 창작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제작되었다.


천상 도시와 황폐해진 지구의 반목은 디스토피아 장르에서 가장 흔한 소재 중 하나다. 영화에선 일본 만화 '총몽'을 원작으로 하는 알리타: 배틀엔젤과 맷 데이먼 주연의 엘리시움이 공중의 낙원을 파괴하려는 주인공의 여정을 그리고 있고,  미국 서점가를 강타한 헝거게임과 다이버전트 역시 도시 간의 차별과 전쟁이 주된 줄거리다. 뮤지컬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에서 '바깥세상'으로 대변되는 지구는 오염과 전쟁, 질병 등으로 살아있는 지옥이 되었고 소수의 사람만 지상 낙원인 밀양림에서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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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 연극 무대



소재의 유사성을 제외하고도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는 여러 디스토피아 소설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많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단연코 주인공 유울모의 의상과 머리 모양이다. 그의 재킷은 쉽게 볼 수 없는 원색들의 향연이고 닭 볏 같은 머리 모양은 알록달록한 염색으로 물들어 있다. 파라오 같은 짙은 눈 화장은 연극을 위한 분장임을 감안해도 과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괴상하리만치 화려한 분장은 헝거게임에 등장하는 수도 캐피톨 시민들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다. 헐벗고 굶주린 무채색의 도시와는 대조적으로 이들의 사치스러움과 허례허식을 보여주기 위한 극적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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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게임에 등장하는 캐피톨 시민의 모습



밀양림에는 슬픔도, 고통도, 질병도 없다. 신체적 접촉과 애무 대신 원격으로 섹스를 즐기며 썩은 식물은 즉각 격리 조치된다. 흡사 로이스 로이의 SF 소설 '기억전달자'가 떠오르는 설정이다. 모든 부정적 감정은 부정적인 사회 현상을 촉발하므로,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는 천상 도시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다.


두 이야기 모두에서 '거울'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기억전달자에서 거울을 소유하는 것은 규칙 위반이다.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에서 거울 제작자인 미아보라는 밀양림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거울 속 세상에 아지트를 만든다. '거울'은 나와 타인을 비춰주는 창으로 반성 및 성찰의 상징이자 세상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통로다. 밀양림에서 거울은 미아보라와 유울모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밀양림의 부조리를 깨닫게 해주는 극적 장치로써 활용된다.


그러나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는 무너져 가는 바깥세상이 아닌 천상의 낙원 내부에서 이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점에서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과는 차별점이 있다. 보통 디스토피아 장르는 도시의 외부에서 주인공이 낙원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이를 무너뜨리려는 영웅적 서사를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는 도시 내부의 인물이 부조리를 깨닫고 이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이러한 시점의 차이가 기억전달자에서는 거울이 금지되었지만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에선 거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다. 밀양림에서는 반성과 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밀양림에서 생명은 유전자 조작으로 괴상하게 변한 생쥐만큼이나 하찮은 존재다. 미아 보라는 유전자 테러로 식물로 변한 자신의 몸을 보며 밀양림은 생명에 지독히도 무관심하다고 울부짖는다. 식물로 변한 그녀를 동정하기는커녕 '동굴마녀'라며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슬픔이 기쁨에게'는 유울모의 할머니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도 잘 어울린다. 그녀는 밀양림이 지어지기 이전에 태어나 '우울'이 존재하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밀양림에는 고통도, 슬픔도 없다. 그러나 오로지 기쁨과 쾌락만이 존재하는 세상은 이미 낙원이 아니다. 슬픔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기쁨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유울모가 추한 미아보라에게 이끌리고 고통, 질병, 슬픔으로 가득 찬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움과 건강, 행복의 정수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자가 공허한 쾌락 대신 괴롭더라도 진실한 삶을 살아가길 원했던 할머니는 '우울'의 반지를 하나뿐인 손자에게 건네며 예정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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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 커튼콜



원래도 약간 난해한 감이 있는 뮤지컬이지만, 결말부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미아보라는 결국 허깨비나 다름없는 밀양림 시장과 밀양림 그룹의 사장을 조종하던 인공지능 판을 파괴하는 데 성공하지만, 판은 밀양림은 이미 실체가 없는 공허가 되어 네가 절대로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판이 말한 '실체가 없는 공허'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밀양림 깊숙이 박힌 뿌리 깊은 욕망과 이기주의라 말하고 싶다. 사람들의 의식은 실체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의식 속에 자리를 잡은 것은 절대 파괴할 수 없다.


유울모는 극의 시작에서 그러했듯이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밀양림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하선하기 위해 일어선다. 그리고 떨어져 있는 썩은 사과를 집고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극은 막을 내린다. 썩은 사과와 미아보라, 바깥세상 모두 유울모를 위선적인 밀양림에서 벗어나 '평등한 슬픔의 얼굴'을 깨닫게 해주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슬픔의 얼굴을 깨닫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또다시 밀양림의 안락함에 함몰된 그는 썩은 사과가 주는 충격과 자괴감에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를 집필하고 기획한 김진우 작가의 말대로, 이 뮤지컬은 모호하고, 모순적이고, 혼란하다. 그러나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가 단순히 난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는 장르의 다양성이 배척되는 SF의 불모지 한국 문화계에서 독특하게 자라난 외래종이다.


이 뮤지컬의 호불호 여하를 막론하고,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가 전에 없던 시도를 통해 한국 SF 뮤지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뮤지컬은 가치가 있다. 김진우 작가의 말마따나 한국 문화계가 좀 더 다양성을 포용하는 관용을 베풀어주길 바라며, 이 뮤지컬이 그 지평을 넓혀주는 시발점이 되어 주길 고대한다.





[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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