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체 또는 신체, '인형'예술에 대하여 [시각예술]

글 입력 2018.12.30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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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은 ‘인간의 모형’이기 때문에 인간과 최대한 핍진한 형태로 제작된다. 이로 인해 인형은 애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반면, 누군가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그것이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아름다운 외형, 그리고 소유자와 오랜 시간 함께 함으로써 얻어진 친밀함 때문이고,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 인형의 외관이 낡아지고, 부분이 고장 나고, 결국 버려지고 잊히게 되면서, 인간을 어설프게 모사한 생기 없는 텅 빈 시체처럼 보여 우리에게 ‘두려운 낯섦’, 즉 언캐니를 체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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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벨머와 에드워드 키엔홀츠는 이러한 인형을 예술적인 도구로써 작품 속에 적용했다. 인간의 ‘몸’은 20세기 미술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했는데, 그것은 오랜 시간 이성의 강조로 인해 억압되었던 ‘불완전’한 몸의 해방, 삶과 죽음을 직접 경험하는 인간 실존의 토대인 육체에 대한 강조, 폐쇄적인 예술 세계가 아닌 실제적 삶에 관심을 두는 현대미술의 경향 등과 연관되어 있다. 인형의 몸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몸을 재현하는 수단으로써 강력한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비롯한 현대 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초현실주의 예술가인 한스 벨머, 그리고 그와 약 20년 차이를 둔 펑크 아티스트인 에드워드 키엔홀츠가 동일한 소재인 ‘인형’을 사용하는 과정에서의 나타내는 차이점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이들 작품이 가지는 의미, 그들이 파악한 인간의 신체, 삶과 죽음,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한스 벨머의 ‘살해된 시체’



한스 벨머에게 있어 인형 또는 몸은 “우리에게 재배열해 달라고 손짓하는 문장과” 같은 것이었다. (민지희, 2015) 그에 따르면, 인형이 생겨나는 전제 조건은 상호 교환 가능성이며, 육체의 각 부위는 ‘알파벳 철자’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의 핵심은 “철자를 재배열하여 새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영옥, 이유진, 2017) 단어들이 자유롭게 상호 교환되는 언어의 구조처럼, 벨머의 인형 역시 해부되고 절단되어 다시 새로운 형태로 창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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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Hans Bellmer, <Die Puppe(The Doll)>, 1934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사진 작업에는 신체의 각 부분이 토막 난 채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인형이 담겨 있다. 사실적인 토르소, 삐져나온 머리카락의 생생한 느낌은 동근 모양으로 마감된 인형의 관절 및 생기 없는 창백한 얼굴과 서로 대비되어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큰 충격을 가한다. 생명과 죽음, 사실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해체된 사지와 그것이 다시 조립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섬뜩한 화면에서, 우리는 익숙함에서 출발하는 두려운 낯섦, 즉 언캐니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의 재배열에 따라 인형은 더 이상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사건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살해된 시체를 나타내는 비유가 된다. 그림 2에서도 볼 수 있듯, 인형의 차갑고 거친 몸체는 사람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 같은 옷가지, 그리고 부드러운 침구와 대비 되어 죽음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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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Hans Bellmer, <Die Puppe(The Doll)>, 1934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앙드레 브르통이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한데 뒤섞여 있는 예로 인형”을 든 것처럼, 벨머의 인형은 생명이 있던 것의 죽음, 해소되지 않는 성적 욕망 등이 교차하는, 다시 말해 초현실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성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정윤희,2018). 성과 죽음에 대한 그의 탐구는 1949년, 두 번째 인형 시리즈에서 한층 발전하여 더욱 노골적인 성적 살해의 현장을 재현했다. 첫 번째 시리즈와 달리, 두 번째 시리즈에서는 인형이 실외에 설치되고, 다리만 4개가 있는 기괴한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림 3에서는 인형뿐만 아니라 건장한 남성의 실루엣 또한 등장하는데, 남성의 관음적 시선 아래 여성의 신체는 완전한 전체가 아닌 뒤틀린 부분으로 왜곡된다. 이때 여성의 신체에서, 머리가 있는 상체는 없어지고, 성기가 있는 하체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눈이 없는 여성은 남자가 떠나가면 속수무책으로 야산에 유기된 채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아가 하얀 양말과 메리제인 구두는 소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이러한 소녀의 신체를 숨어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은 “관음증을 넘어 어린이 납치나 강간, 살인 혹은 시체 애호증 등을 연상케 하는 뭔가 도착적이고 병리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 (정윤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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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Hans Bellmer, <Les Jeux de la Poupee(The Doll’s Games)>, 1949



에드워크 키엔홀츠의 ‘소모된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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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Edward Kienholz, <Roxy’s>, 1960-61


이렇듯 인형의 각 부분을 배열하거나 조립하여 ‘살해된 몸’로써의 신체로 표현한 한스 벨머와 달리, 에드워드 키엔홀츠는 인형을 통해 ‘소모된 몸’으로써의 신체를 나타냈다.

우선, 에드워드 키엔홀츠는 펑크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펑크라는 말은 ‘지독한 악취’를 의미하는데, 이는 펑크 아티스트들이 사용하는 재료가 주로 이미 소모된 쓰레기나 폐품들이기 때문이다. <Roxy’s>(그림4)의 인형들 역시 멧돼지 해골, 우체통, 쓰레기 캔과 변기 등을 각기 다르게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이를 통해 1940년대 LA의 매음굴, 그리고 그 속에서 사물로 취급되어 마치 폐품처럼 낡아지고 닳아지고 있는 여성들의 신체가 나타났다. 시계가 배에 삽입된 인형은 성을 시간 단위로 사고파는 행위를, 낡은 문이 열려 있는 우체통이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인형은 모든 이가 아무렇게나 침입할 수 있는 신체의 무기력함을, 재봉틀 위에 반듯이 누워 말라비틀어진 다리가 펌프질을 통해 팽창하고 수축하기를 반복하는 인형은 상품화된 여성의 신체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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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Edward Kienholz, <The Birthday>, 1964


<Roxy’s>가 성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마모된 여성의 신체를 다뤘다면, <The Birthday>는 출산의 도구로써 사용된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고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출산의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데, 여자의 배를 뚫고 나오는 화살은 극렬한 고통을 나타내지만, 그녀의 입에 물린 어항은 그녀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바꾸고 만다. 그녀남편의 존재(정확히는 부재)는 카드를 통해 알려진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인(Jane)에게:
   해리가 나를 필요로 해서
   지금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아.
   엄마는 조금 늦는대.
   잘 버티고 있으렴.
   하하.
   딕(Dick)이

로버트 핀커스에 따르면, 제인과 딕은 여성과 남성을 대표하는 매우 전형적인 이름이다. 따라서 관람자는 그 누구도 제인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딕의 부재를 비난할 수 없게 되며, 제인의 다리 사이에 놓인 거울 역시 관람자 모두가 둘의 상징적 자식이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수많은 관람자가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지된 채로, 그리고 버려진 채로, 홀로 이 고통을 견뎌내며 출산하는 인형 제인의 몸은 아직도, 여전히 고갈되고 부식하고 있다.



한스벨머의 ‘사진’


한스 벨머와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인형’ 작업은 위에서 다룬 주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매체적 측면에서도 구별된다. 한스 벨머의 ‘인형’ 시리즈는 모두 사진 작업인 반면,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작업은 관객이 직접 들어갈 수 있는 앗상블라주 작업이다.먼저 한스 벨머의 사진 작업을 살펴보자. 그는 왜 ‘사진’이라는 매체를 선택하였을까?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자신들의 선구자로서 평가받는 장 외젠 앗제의 ‘사람 없는 파리 거리 사진’ 작업을 통해, 사진은 최초로 제의적 가치가 아닌 전시적 가치를 전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초상사진에서는 인간의 표정으로부터 마지막 아우라의 신호가 포착되지만, 인간이 부재한 사진은 아우라가 탈락하여 마치 범행 현장에서 증거를 남기기 위해 촬영하는 사진처럼 “역사과정의 증거물이 되기 시작했다.” 또한, “사진에 의한 기술적 복제는 원작의 특정 부분들을 강조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육안에는 잡히지 않지만 렌즈를 조절하거나 렌즈의 위치를 자유로이 선택함으로써 가능하다. (...) 이에 덧붙여 기술적 복제는 둘째로, 원작의 모상을 원작 자체로서는 도달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옮겨갈 수 있다.” (발터 벤야민,1936)

따라서 정리하자면, 사진은 곧 언제든, 어디에서든, 그리고 누구에게나 도달될 수 있는, 어떠한 특정적 의도가 두드러지게 확대된 하나의 증거물로써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의 이러한 특성은 한스 벨머의 작업에 적합했다. 그의 사진 작업은 살해된 몸이 한껏 강조된 각도로 찍힌 범행 현장의 증거물이자, 사진집 속에 놓임으로써 수많은 누군가의 ‘소장품’이 될 여지가 있어 도착적 소유욕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사진의 사실성으로 인해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사진에 나타난 이미지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 이미지가 그거 기표일 뿐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인간의 의식이 너무 무비판적이고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민지희,2015). 하지만 사진의 기표와 기의를 혼동하는 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행위이다. 너무나도 사실적인 사진은 동시에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벤야민을 언급하자면, 그가 주장하기로 예술 형식의 완성은 세 가지의 경로를 통해 도달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사회적 변화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예술형식을 위해 도움이 되도록 [예술작품의] 수용방식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발터 벤야민,1036). 이러한 맥락에 따라, 우리는 한스 벨머가 나치 정권하에서도 스캔들적 요소의 도입과 언캐니한 감정의 유도를 통해 대중이 가지고 있던 기존 수용방식에 충격을 가해 인간의 무의식적 세계를 표면화를 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덕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앗상블라주’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의 앗상블라주 작업은 특정 장면을 마치 정지시킨 것처럼 전체적으로 나타내어 관람자가 직접 그 현장을 체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작업은 어찌 보면 정적인 연극과도 같다. 그는 이러한 장면 연출을 통해 전시 공간을 활성화하고 작품을 미국 사회 속의 착취, 속임수, 그리고 파편화라는 사회적 힘에 대치하는 논쟁의 장으로 변형시켰다 (Allan, K., & Mitchell, W. J. T, 2005). 주재료가 폐품인 것 역시, 그가 생활했던 LA가 “매일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가 발생하는” 도시였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서정은, 2016), 벨머와 달리, 그가 나타내고, 참여하도록 이끄는 세계는 결국 우리의 실제 세계를 축소한 하나의 평행 세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각적 요소 이외에도, 촉각, 청각, 그리고 후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추가된다. 다시 말해 한스 벨머가 나타낸 것이 하나의 ‘초현실’이라면, 에드워드 키엔홀츠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주목한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누군가의 신체를 외부자의 시각에서 대상화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닌, 관람자가 자신을 투영하여 동화될 수 있도록 하는 신체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인형은 곧 우리이고, 소모되고 고갈되고 있는 인간의 육신이라고 볼 수 있다.



내용적 유사성: 개인경험과 사회비판


한스 벨머의 인형 시리즈는 1931년 어머니가 보내준 어린 시절의 장난감 상자에서 인형을 발견한 것에서 출발한 것으로, 개인적 차원에서는 가부장적 질서의 피해자로서, 권위주의적인, 그리고 나치 추종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저항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나치 정권이 주창했던 아라얀 인종의 완벽한 신체에 대한 컬트”를 비판하고 있다 (민지희,2015). 그의 인형은 인간병기로서 사용될 수 있는 건강하고 완전한 몸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으로 인해 다치고 훼손된 몸에 가깝다. 그로테스크하고 언캐니한 인체를 사진에 담아냄으로써 한스 벨머는 비로소 우리가 몸에 대해 관습적으로, 또는 무반성적으로 투영했던 고정적인 관념들, 예컨대 신체에 대한 이상화, 여성의 몸에 대한 성적 대상화, 타인의 육체에 대한 관음적 호기심 등을 토막 내어 살해하고, 기형적으로 재구성하여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그의 작품은 분명히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에로틱한 소재인 그의 인형은 성적 욕망보다는 오히려 섬뜩하고 두려운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키엔홀츠의 <Roxy’s> 역시 그가 실제로 유년 시절 매음굴에 갔던 기억을 떠올려서 재구성한 작업으로, 그는 당시 성적 흥분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불쾌한 감정만을 느꼈다고 밝힌 바 있다 (서정은,2016). 그가 느꼈던 불쾌함과 불편함의 감정은 관람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추하고 소모된 인형을 통해서 말이다. 따라서 키엔홀츠 개인의 감정은 관람자 모두의 감정으로 동화되고, 말없이 배치된 인형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드러내는 장치인 동시에 관람자들 자신 역시 이러한 사실을 목도하고도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은 암묵적 가해자라는 것을 반영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송미숙, 1994).

이상으로 살펴본바, 한스 벨머와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인형’ 작업은 각각 묘사하고 있는 신체 자체, 그리고 표현 방식에 있어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전자는 ‘살해된 시체’를 사진으로, 후자는 ‘소모된 신체’을 앗상블라주로 상이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의 제작 배경, 전달 의도와 파생 효과는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양자의 작품은 모두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작품의 언캐니한 특성으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렇듯 ‘인형’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같고 또 다르게’ 사용한 한스 벨머와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작업은 관람자에게 불쾌감을 일으키고 아름다움과는 상당한 거리를 둔 작품들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언캐니와 추함이야말로, 그들 작품의 의미를 밝혀주는 진정한, 그리고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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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국내]
1. 정윤희, (2018), 「경계 위반과 해체의 미학 –한스 벨머의 《인형》 시리즈를 중심으로」, 『독일언어문학』, 40, 211.
2. 민지희, (2015), 「인형 스캔들: 오스카 코코슈카와 한스 벨머를 통해 본인형의 사회적 의미」, 『도예연구』, 24, 29.
3. 김영옥&이유진, (2017), 「재구성된 신체이미지의 표현 양상 연구 –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인형시리즈를 중심으로」, 『조형디자인연구』, 20(3), 1-22.
4. 서정은, (2016),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술집(The Beanery)> 다시 읽기: 1960년대 로스앤젤레스 미술계의 지역 정체성을 중심으로」, 서울 : 서울대학교 대학원.
4. 발터 벤야민 지음, 심철민 옮김,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서울: 도서출판 b. 2017.

[해외]
1. Pincus, R. (1980), Edward Kienholz: His Oeuvre and Its American Cultural Context, 1953-1973, ProQuest Dissertations and Theses.
2. Allan, K., & Mitchell, W. J. T. (2005), Making the Scene: Assemblage, Pop Art and Locality in 1960s Los Angeles, ProQuest Dissertations and Theses.
3. Pincus, R. (1987), On a Scale That Competes with the World: The Art of Edward Kienholz and Nancy Reddin Kienholz, ProQuest Dissertations and Theses.




[한선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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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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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하는스누피
    •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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