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비테프스크

글 입력 2018.08.03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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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샤갈의 마을에서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에 관자 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어딘가 익숙한 이 시는 1969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김춘수 시인의 <김춘수 시선>에 수록되어 있다.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이 샤갈의 그림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는 샤갈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이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그림을 보았던 것일까? 제목이 비슷한 샤갈의 <나와 마을>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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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나와 마을>


<나와 마을>은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샤갈의 작품이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교재 안에서 이 그림을 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초록색 얼굴을 가진 사람과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미술시간에 ‘명화 따라 그리기’를 해 본 친구들이라면, <나와 마을>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못지 않게 자주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림에 쓰인 화려한 색채들은 마치 봄의 귀환을 환영하는듯하니, 시에 적힌 ‘봄’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나와 마을>에서 ‘봄’은 느껴지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시라면, 그림 속에 ‘눈’이 내리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자. 또 다른 그림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그의 대표작 <눈 내리는 마을>이다. 온 마을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고 한 남자가 지붕 위를 날고 있는. 그리고 바로 그 작품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제목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림 옆에 적힌 제목은 <비테프스크 위에서>였다.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나와 마을>이라는 그림의 제목과 혼동되어,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샤갈의 작품 제목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얼마나 이 가상의 제목이 유명했던지, 아직도 전국 각지에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간판을 지닌 카페나 식당이 있다고 한다.



눈 내리는 마을, 비테프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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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비테프스크 위에서>


김춘수 시인의 시 속에 펼쳐지는 ‘샤갈의 마을’은 실제로 참 아름다울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봄을 맞이하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떨릴 때, 눈이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 상상을 하면, 겨우내 굳은 땅덩어리들 속에서 여린 잎이 위로 돋아나는 움직임과 하염없이 하강하는 하얀 눈들의 움직임이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는 풍경이 떠오른다. 그런데 실제로 샤갈이 그린 <비테프스크 위에서>를 보니, 아름답고 서정적이라기보다, 깊은 우울함이 느껴졌다. 무슨 사연이 그림이 담겨있었던 것일까?

비테프스크는 샤갈의 고향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고 싶어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음에도, 그곳을 늘 그리워했다. 그런데 이 비테프스크는 아픈 사연을 지닌 곳이라고 한다.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심했을 당시, 유대인들은 강압적으로 특정 지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지역들 가운데 하나가 이곳이었다. 시 속에서 등장하는 ‘사나이’로 보이는 사람은 하늘을 날며 지붕 위를 걷고 있는데, 유대인의 언어로 ‘지붕 위를 걷는다.’는 것은 ‘집집마다 구걸한다.’라는 것을 뜻한다고 전해진다. 또한 한 손에 든 짐 보따리는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이곳 저곳을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유대인들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마주한 그의 그림이 시에서 느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서, 과연 김춘수 시인이  정말로 <비테프스크 위에서>를 보고 지은 시일까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에 두 사람은 각자의 작품 속에서 모두 희망을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샤갈은 유대인으로서 지니고 살아야 했던 아픔과 상처들이 그림을 통해 기억되고 치유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아직 찬기가 가시지 않은 3월의 눈 속에서 마을의 열매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눈과 어둠밖에 없는 밤에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이 피어나길 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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