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마리 로랑생 展_색채의 황홀

글 입력 2018.01.03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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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마리 로랑생 展_색채의 황홀


마리로랑생포스터-01.jpg
 

파리의 뮤즈, 마리 로랑생 전시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3월 11일까지 개최되는 전시이다. 'Musee Marie Laurencin'은 1983년 마리 로랑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나가노에 설립되었다. 100여점의 마리로랑생 작품으로 시작된 미술관은 약 500여점의 마리로랑생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단일 화가의 컬렉션으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2011년 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리뉴얼 공사에 돌입하면서 작가의 고향인 프랑스 마르모탄 모네를 시작으로 순회전시를 진행하게 되었다. 2017년 한국에서의 전시를 마지막으로 작품은 일본 토쿄의 새 미술관에서 전시될 예정으로 세계 순회전의 마지막을 한국에서 장식하게 되었다.



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 1883 ~ 1956)


33세무렵, 마드리드에서, 1916.jpg
 

마리 로랑생은 1905년 당시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공동 작업실이었던 '세탁선(Bateau Llavoir)'에서 피카소, 아폴리네르, 장콕토, 모딜리아니 등과 교류하며 '단순한 형태와 감미로운 색조를 사용하여 슬픔을 표현한 시적인 여성상'이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냈다. 제 1-2차 세계대전의 풍랑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마리는 입체파와 야수파의 경향을 작품에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활약하게 된다.


30세, 아폴리네르와 노르망디의 여행에서, 1913.jpg
 

마리 로랑생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당대 유럽사회에서 여성에게 부가된 부르주아 여성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화가로서, 문학가로서 자신의 길을 당당히 견지한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또한 인테리어 디자인, 무대 미술,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양한 시각예술분야에서 활동하였고 <밤의 수첩>이라는 저서를 출간하는 등 문학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어느날 브라크는 이전의 앵베르의 아틀리에를 갑작스레 떠났을 때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처음 보는 아가씨를 데리고 바토 라부아르를 찾아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어머니, 그리고 예쁜 고양이와 함께 샤펠 가에 살고 있다는 그 여자는 독측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사부아 출신의 그녀는 흑인의 피가 흐르던 푸슈킨의 러시아 후손들의 아름다움을 떠오르게 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로랑생이었다.

-롤랑 도르즐레스 보헤미안의 꽃다발 중에서


마리 로랑생은 세탁선에서 만난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마리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의 주인공이자 연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욤은 그녀의 작품 세계와 그녀의 화풍에 매우 감탄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 작품세계를 함께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마리 로랑생의 섬세한 기술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독창적 예술의 하나이다. 그녀의 그림은 구성도, 색상도, 혹은 데생도 다른 것을 모방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에 영감을 불어넣는 그녀만의 감정과 감각을 볼 때 그녀의 작품세계는 르네상스 혹은 여타의 감정과도 유사성이 없는 독창적인 세계임을 느끼게 된다.

-기욤 아폴리네르 '타협자' 중에서


사실, 미라보 다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는데, 미라보 다리는 세계의 명시로 꼽히는 유명한 작품이다. 기욤은 "더 이상 사랑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마리를 사랑했다. 그러나 뜻밖에,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아폴리네르가 연루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때, 마리는 독일인 남작과 결혼하게 되고, 실연의 아픔을 담아 아폴리네르가 노래한 것이 전 세계인이 애송하는 명시 '미라보 다리'이다.



"
미라보 다리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 잡고 얼굴 오래 바라보자
우리들의 팔로 엮은
다리 밑으로
끝없는 시선에 지친 물결이야 흐르건 말건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사랑은 가 버린다 흐르는 이 물처럼
사랑은 가 버린다
이처럼 삶은 느린 것이며
이처럼 희망은 난폭한 것인가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인 남작과의 결혼생활에 실패한 마리는 '진정제'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는 한국에서는 '잊혀진 여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
진정제

지루하다고 하기보다 슬퍼요.
슬프다기 보다
불행해요.
불행하기보다
병들었어요.
병들었다기보다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다기 보다
나홀로.
나 홀로라기 보다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 보다
죽어 있어요.
죽었다기 보다
잊혀졌어요.
"


마리가 이 같은 시를 썼을 때, 결혼 후 불과 1개월 만에 터진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재앙과 같은 신혼생활을 보내야 했다. 독일과 프랑스 어디에도 돌아갈 수 없었으며 스페인을 도피처 삼아 유랑해야만 했다. 이에 겹쳐 남편 오토의 알코올 중독과 방탕한 생활이 마리의 정신 상태를 극한으로 내몬다.


나는 아주 슬펐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검은색과 흰색이 주조를 이룬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분홍색과 푸른색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 로랑생



책읽는 여인, 1913년경, 캔버스에 유채, 91.5x72, Musee Marie Laurencin.jpg
 책읽는 여인, 1913년경, 캔버스에 유채
91.5x72, Musee Marie Laurencin


이 당시에 마리의 작품은 대부분이 회색으로 이루어져 있고 자화상에는 모두 철창과 같은 모티브가 작품에 담겨있다. 오도 가도 못하는 불행한 시기에 의지할 곳은 남편뿐인데, 그 남편마저 의지할 수 없으니 힘들고 외로운 시기를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파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과 언젠가는 파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현재 갇혀있는 자신의 불행한 마음을 회색을 주로 사용하여 잘 나타낸다.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에서의 춤, 1913, 캔버스에 유채, 112x144, Musee Marie Laurencin.jpg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에서의 춤, 1913
캔버스에 유채, 112x144, Musee Marie Laurencin


이 시기는 그래서 마리에게 불행한 시기였을지 몰라도, 마리 스스로가 색채에 대한 섬세하고 미묘한 사용과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통해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간 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의 작품을 보면 온통 회색으로 덮여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와중에 빛나는 파스텔톤의 핑크와 파랑색이 불행한 그녀의 상황과 대조되면서도 알 수 없는 희망과 기대감을 주는 작품들이 많다. 회색조를 사용하여 암울하고 가라앉아있는 느낌이 주를 이루지만, 와중에도 잃지 않는 그녀만의 독자적인 색채 사용과 윤곽선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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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城)안에서의 생활, 1925, 캔버스에 유채
114.4x162.3, Musee Marie Laurencin


그리고 남편 오토와의 이혼 후 1920년대에 프랑스 국적을 회복하고 파리로 돌아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여성 예술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한다. 마리 로랑생은 작품에 대한 지적인 관념 대입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녀는 오롯이 본능과 직관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윤곽선이 모호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색채를 사용하여 몽환적인 세계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끊임없이 담아냈다. 이런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화풍은 마리 로랑생이 입체파나 다다이즘의 추종자 신세를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다. 파블로 피카소, 앙리 루소 등 야수파와 큐비즘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끊임없이 교류했음에도 이들과는 전혀 다른 여성적이고 우아한 스타일을 완성해낸 여성 화가라는 점에서 마리 로랑생이 서양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적지 않다.


파블로 피카소, 1908년경, 캔버스에 유채, 41.4x33.3, Musee Marie Laurencin.jpg
파블로 피카소, 1908년경, 캔버스에 유채
41.4x33.3, Musee Marie Laurencin


이후,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0년간 그녀는 예술활동에 집중했다.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의상과 무대 디자인, 일러스트, 인테리어 등 많은 분야에서 그녀의 작품성을 발휘했다.

나는 그 중에서 샤넬의 초상화를 그렸을 때의 스토리가 기억에 남는다. 샤넬과 마리는 작품으로서 친해져 굉장히 많은 교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샤넬의 작품에 마리의 화풍이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작품 교류가 활발했다. 이런 친분을 유지하던 샤넬과 마리는 샤넬이 마리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면서 삐걱거리게 된다. 샤넬의 초상화를 그린 마리는 초상화를 샤넬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샤넬은 자신을 너무나도 약하고 무력하게 표현한 마리에게 수정을 요구하게 된다. 샤넬 또한 여성으로서 자존심이 강하고 남성들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의 그런 면모가 더욱 부각되었으면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마리는 샤넬의 수정 요구에 분노하게 된다. 아마 마리는 자신의 작품성이 부정당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결국 화가 난 마리는 샤넬의 초상화를 수정하긴 커녕 그 초상화를 샤넬에게 전해주지 않고 교류 또한 끊었다. 결국 마리의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한 그 그림은 마리의 사후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런 스토리가 있어서인지, 나는 피카소의 초상화보다 샤넬의 초상화가 더욱 기억에 남는다.


세명의 젊은 여인들, 1953년경, 캔버스에 유채, 97.3x131, Musee Marie Laurencin.jpg
세명의 젊은 여인들, 1953년경, 캔버스에 유채
97.3x131, Musee Marie Laurencin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건강이 악화되고 사회적으로도 고립된 그녀의 작품은 정형화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마리 로랑생은 70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고 예술혼을 불태웠다. 이 당시에 마리 로랑생의 작품에는 황색과 진한 빨강색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원색적인 색감보다는 파스텔톤을 애용하고 사랑하던 마리 로랑생의 화풍이 조금은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 근시가 악화됨에 따라 흐릿한 윤곽선과 파스텔톤의 은은한 색감을 자랑하던 그녀의 작품이, 뚜렷한 윤곽선을 사용하게 되고 조금 더 진한 색채를 사용하게 된 것에 그녀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꽃과 비둘기, 193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5x125, Musee Marie Laurencin.jpg
꽃과 비둘기, 193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5x125, Musee Marie Laurencin


그러나 나는 오히려 몽환적이던 작품들이 조금 더 또렷해지는 것을 보며 현실적인 느낌과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녀만의 장점을 잃은 것에 대해서는 나 또한 안타까웠지만 새로운 느낌의 화풍이 나쁘지 않았고 70이 넘는 나이를 극복하고 그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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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 다리와 진정제를 필사할 수 있는 체험공간과 마리의 생애를 연표로 정리한 공간, 그리고 마리 로랑생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김용관 작가의 설치 구조물을 마지막으로 전시가 끝이 난다. 이 조형물도 기억에 남는데, 마리 로랑생 작품의 은은한 색감과 유연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차용하여 딱딱하고 직선적인 기존의 모듈 박스를 탈피했다.

처음 모든 전시를 다 보고 난 후, 나는 다시 전시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땐,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하지 않고 작품을 감상했는데, 마리를 조금 더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여성적인 화풍을 자랑하는, 피카소와 샤넬의 초상화로 유명한 화가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생애를 둘러보았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마리는 훨씬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그 모든 그녀의 심리 상태가 작품에 반영되어 있어 마치 하나의 소설을 읽는 듯 했다.

그래서 작품 하나하나에 얽힌 스토리들과 의미를 조금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 두 번 전시를 관람했다. 다시 본 마리의 작품은 보면 볼 수록, 왜 여성스러운 화풍이라고 하는지, 그 작품 안에 얼마나 수려한 곡선이 어우러져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처음엔 그냥 지나쳤던, 작품도 '아, 이래서 이런 이름을 붙였구나', '아, 이 부분이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구나'하며 마치 내가 1920년대 그 어디쯤에서 마리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자화상, 1905년경, 목판에 유채, 40x30, Musee Marie Laurencin.jpg
자화상, 1905년경, 목판에 유채, 40x30
Musee Marie Laurencin


그녀의 심리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터치와 색감, 작품의 의미, 그 안에 담긴 메타포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모든 작품에서 잃지 않는 여성적인 색감과 곡선은 어떻게 이렇게 조화롭게 사용할 수 있는지 싶을 정도로 수려하고 우아하다. 남자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여성스러움과 우아한 화풍을 잃지 않은 것이 존경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리가 죽고 난 후 마리의 위대함이 몇몇 평론가에 의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중 프랑스의 비평가 다니엘 마르세이유는 자신의 여성성을 감추거나 왜곡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드러낸 그녀의 작품세계는 이 화가의 위대함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약점인 그 부분을 감수하면서도 드러낸 것은, 남자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빛내기 위한 마리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죽는 것보다도 잊혀지는 것이 가엽다던 마리의 시처럼, 그녀는 지금 죽고 이 세상에 없지만 우리는 그녀를 잊지 않았으며 많은 작가들과 디자이너들, 화가들에게 좋은 영감을 주는 훌륭한 화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지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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