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늘 밤은, 일기를 쓰세요. [문화전반]

나의 일기 역사
글 입력 2017.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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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야 할 일을 얼추 마치고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간. 잠을 자기에도 3시간도 채 못 잘 것 같아서 그보다는 깨어있는 걸 선택했다. 5시간 넘게 붙들고 있던 노트북은 쳐다 보기도 싫고, 핸드폰을 보기에도 눈이 아플 것 같고 또 책을 읽기에는 잠이 들 것 같아서 결국 방정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피곤한 몸 때문에 바닥에 주저 앉아서 한동안 건들지 않았던 책상 밑을 정리해볼까 하며 들여다 보는데, 먼지 쌓인 상자를 발견했다. 사실 잊고 있었던 건 아니다. 언제나 그곳에 있다는 걸 알지만 소중해서 가끔씩만 꺼내어 보는데 상자를 보자마자 그때가 오늘임을 직감했다. 상자 자체도 별볼일 없는 상자이지만, 상자 안에는 더 별볼일 없는 노트들이 몇 권 들어있다. 바로 일기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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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your_moon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기’라는 것을 접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에서 주어진 숙제였을 것이다. 나도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일기의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일기 쓰기를 귀찮아 했던 주변의 몇몇 친구들과는 달리 꽤 성실하고 즐겁게 했던 숙제였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의 미학은 정말 소소했던 일상에도 있지만 20명이 넘는 아이들의 일기에 매번 애정을 담아 적어주신 선생님의 작은 글이었다. 거의 매주 주말마다 가족들과 함께 장을 보러 다녀왔고 즐거웠다는 나의 글에 매번 어떠한 것을 보았고, 무엇을 샀는지 궁금해 하셨던 작은 글이 비슷했던 주말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또 어린 동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그 날의 일기에 ‘나’는 무얼 했는지 궁금해 하시는 선생님의 물음이 단순히 일기 숙제 검사를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함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감정이 풍부하고 읽을 거리가 다양한 일기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는 선생님의 사랑과 관심이 담겨있어서 좋다.



  일기 숙제가 주어지지 않았던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는 스스로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펜을 사러 들어갔던 문구점에 마음에 드는 노트가 있었고, 처음으로 용도가 없는 물건을 사게 되었다. 노트로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주절 주절 하루에 있었던 일을 적는 용도가 되었다. 한 페이지로 제한되었던 일기장이 아닌 곳에, 검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일기를 쓰다 보니 일기의 양은 엄청나게 길어졌다. 평균 2장에서 5장까지.



  이렇게 긴 일기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때의 일기노트가 제일 두껍고 많다. 손이 아파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써나갔던 기억이 난다. 이 때의 일기를 읽으면 놀라울 정도로 하루하루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매 교시와 매 쉬는 시간마다 있었던 일을 모두 기록했기 때문이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다양한 일들과 나의 다채로운 감정들이 뒤섞인 노트들을 읽어내려 가면 계절도 생생히 느껴진다. 특히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쌀쌀한 가을이 지금보다 더 길게 만끽할 수 있었음을 새삼 느낀다. 사춘기의 격변하는 감정들과 노느라 바빴던 날들로 채워진 약 4년간의 일기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일기의 길이가 급격히 짧아졌다. 아무래도 아침 일찍 등교했다가, 야자를 마친 후 늦게 귀가하는 날과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일기장도 따로 없었다. 숙제를 정리할 용도로 산 다이어리의 한 켠에 작고 빽빽한 글씨로 조그맣게 써놓았던 그런 공간들이 일기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기가 다채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절에는 뭐 그리 매일 다양한 일이 일어났었는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읽으면서 ‘이런 일도 있었나?!’하며 놀랄 정도이니 말이다. 실제로도 주변 대학교 동기들과 비교해보면 조금은 시끌벅적한 고등학교를 다닌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고등학교 다이어리의 또 다른 재미는 맨 뒤 쪽에 붙여져 있는 수많은 쪽지들과 편지들에 있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지루한 야자시간 혹은 수업시간에 몰래 쪽지로 떠들거나 편지로 덕담을 주고 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따 편의점에 가자는 쪽지에서부터 항상 붙어 다니는 친구에게 새삼 애정표현을 하는 편지까지 그 때의 우리는 참 수다쟁이였던 것 같다. 물론 연애편지도 있다. 차마 그것까지는 읽어볼 수가 없었다. 언젠가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모여서 다이어리를 본다면(대부분의 친구들이 다이어리를 챙겨서 쓰는 편이었다.) 그만한 추억팔이도 없을 것 같다.



  이랬던 내가 유일하게 일기를 쓰지 않았던 해가 있다. 바로 작년, 20살의 1년을 일기 한 줄도 쓰지 않고 흘려 보냈었다. 이 사실을 크게 자각하고 있지는 못했었다. 자라오면서 쭉 함께 했던 일기를 어떻게 1년 동안이나 까먹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다. 핸드폰 캘린더에 채워지는 일정들과 사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올해 1월 1일, 새로 구매한 다이어리에 친구들의 생일을 적어놓으려고 핸드폰 속 캘린더를 넘겨보는데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사실은 사진과 캘린더에 남아 있었지만 그 날의 이야기와 감정은 턱없이 부족했다.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매일 공부하느라 바빴던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매일 달라지는 하루를 써내려 갔는데, 처음 성인이 되고 많은 일들을 겪었던 날들에 대한 글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불과 작년이지만 그때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까마득 했다. 그렇게 일기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 것이다. 빠르게 지나쳐 가는 날들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기를 쓰는 것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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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your_moon



  올해부터는 일기를 다시 꼬박 꼬박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예전처럼 매일 쓰지도 않으며 1장이 넘어가는 분량으로도 쓰지 못한다. 대신에 감정을 많이 담으려고 한다. 그날 있었던 신나는 일을 누구에게 표현한 것 보다 더 크게 담아내고, 속상하고 슬펐던 일은 마음껏 투정을 부리며 써내려 간다. 이렇게 하면 즐거운 일은 더 깊게 각인 되고 좋지 않았던 일은 마음에서 금방 나가고 치유된다. 오늘 밤에는 누구든 일기를 썼으면 좋겠다. 중요한 점은 ‘나만’ 볼 수 있는 일기장에 하루에 있었던 일들과 감정을 가감 없이 써내려 가야 한다는 점이다. SNS에 하루 있었던 일을 자랑하는 글 말고, 친구나 애인에게 하루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 말고. 손으로 직접 종이에 써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성 있는 나의 내면을 담아 낼 수 있고, 훗날 다시 들여다 보았을 때 생각보다 빛나는 보석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인스타그램 @2your_moon (책 <달의 조각> 작가 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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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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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에밀리
    • 안녕하세요, 연수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기'에 대한 연수님의 추억과 깨달음을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느낄 수 있었던 글이었어요 :) 저도 강제가 아닌 스스로 쓰는 일기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는데, 저는 연수님과 일기 쓰는 스타일이 살짝 다른 것 같습니다.ㅎㅎ 저는 매일매일의 사소한 일상까지 기록한다기보다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제 마음에 격렬한 감정이 일어나면 그때 일기장을 꺼내들었거든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저만의 고민을 종이에 꾹꾹 눌러담으면서 그 시절을 위로하고, 또 담아두었던 것 같습니다. 연수님이 중학교 때 쓰신 일기처럼 일상의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담아두는 것도 분명 빛나는 추억이 되겠지만, 시간적 여유가 많이 없는 지금은 가끔이라도 멈춰서서, 내 마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기 쓰기가 될 것 같아요. 초등학교 선생님의 작은 글처럼, 그리고 연수님이 하신 말처럼, 결국 일기는 '나의 내면'을 위한 것이니까요. 오랜만에 일기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던 좋은 글이었습니다. (+) 첨부하신 사진 속 일기들도 정말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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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eonjg
    • 안녕하세요 쓰다듬다, 조현정입니다!
      저도 정연수님처럼 초등학교때 숙제로 일기를 시작했어요. 다들 그렇겠지만요:) 저는 연수님과 달리, 저에게 일기는 선생님께 숙제 검사를 받기 위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중학교때는 연수님처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담니다. 그런데 학업이다 뭐다 하면서 소홀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마음 잡고 일기를 써보자!라고 생각중인데, 마침 정연수님께서 일기에 관해서 글을 써주셨네요:-)
      '비로소 진정성 있는 나의 내면을 담아 낼 수 있고, 훗날 다시 들여다 보았을 때 생각보다 빛나는 보석으로 남아있을 것이다.'라는 글이 와 닿았어요. 빛나는 보석을, 오늘밤 한글자 한글자씩 써 내려가야겠어요. 글 잘 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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