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야망이 있었던 음악인, 프랭크 시나트라를 다시 보다 [공연예술]

글 입력 2017.05.01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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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40~60년대의 대표적인 팝 싱어, 프랭크 시나트라 (Frank Sinatra). 한국 대중에게는 ‘마이웨이 (My Way)’로 유명한 가수로 현대에 비유하자면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가 대단했던 가수이다. 사실 나는 그를 그저 옛날 가수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유행했던 팝송은 재즈와 블루 사이의 느릿한 박자를 갖고 있어 많이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조금 지루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우연히 얻게 된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시나트라가 어떻게 성공적인 음악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또 그가 음악에 대한 어떤 열정을 갖고 있었는지 알아가며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1. All or Nothing at All


 

 1915년 뉴저지시 호보컨, 이탈리아 이민 가정에서 프랭크 시나트라가 태어났다. 사실 그는 그의 진짜 아버지를 모른다. 그에게는 새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는데 그와는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시나트라가 태어날 때 문제가 생겨 그의 왼쪽 목, 귀, 얼굴에 상처가 나게 되는데 나중에 그의 왼쪽 귀가 문제가 되어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게 된다.

 그가 자라날 당시, 미국에는 경제대공황이 일어나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환경은 그가 성공적인 가수가 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는데, 그는 이렇게 힘든 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무조건 전문적이어야 하고 최고의 가수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이때부터 먹었다고 한다.

 그는 극장을 돌며 꿈을 키웠다. 그리고 그는 빙 크로스비 (Bing Crosby)의 공연을 보고 ‘이 사람처럼 되어야겠다’라는 야망을 키우게 된다. 빙 크로스비는 우리가 다 아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른 가수로 그때 당시 최고의 팝 싱어이자 루이 암스트롱부터 배운 재즈를 팝뮤직으로 발전시켰던 아티스트였다. 시나트라는 친구들과 ‘Hoboken Four’라는 그룹을 만들어 라디오방송에도 출연하게 되는데 이후 그는 솔로가수의 성공이란 야망을 품고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공연장에서 노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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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boken Four' 가 라디오 방송하는 모습, 오른쪽 끝이 시나트라이다)


 1937년, 시나트라는 라디오 방송국의 중심지이자 미국 팝뮤직 활동이 활발했던 뉴욕에 오게 된다. 그는 ‘Rustic Cabin’이라는 곳에서 처음 솔로 활동을 뛰게 된다. 우연한 계기로 그는 Quinlan한테 보컬 레슨을 받게 되는데 그 이후 그의 노래실력은 더욱 출중해져서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할 기회를 얻고 팬레터를 받기 시작한다.

 그의 노래실력을 보고 베니굿맨의 오케스트라(Benny Goodman Orchestra)에서 트럼펫을 맡고 있었던 해리 제임스(Harry James)에게 같이 밴드활동을 할 것을 제안 받는다. 그때부터 그는 미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그의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고 그는 ‘All or Nothing at All’이란 노래를 발표한다.

 해리 제임스와 2년을 계약하고 활동을 개시했으나 시나트라는 토미 도시(Tommy Dorsey)라는 트럼본 연주가로부터 밴드 제의를 받게 된다. 토미 도시는 해리 제임스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명성을 갖고 있던 밴드를 갖고 있었던 사람. 결국 그는 토미 도시를 선택한다. 그러나 점점 토미 도시보다 시나트라가 유명해지자 나중에 그들은 갈등을 빚게 되고 결국 서로 ‘Good bye’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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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도시와 시나트라)



2. Nancy with the Laughing Face




 이 노래는 자신의 딸이 태어났을 때 만든 노래로 딸 출산 때는 함께 있지 못했지만 어딜 가나 자신의 딸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미 토미 도시로 인해 인기가 높아진 시나트라는 아이돌 못지않은 사랑을 받게 된다. 특히 10대 소녀들은 가만히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무대로 전진하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으니 열기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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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트라와 여성팬들의 모습)


 그는 뉴욕 파라마운트 극장(Paramount Theatre) 뉴이어 이브 날, 롤 모델이었던 빙 크로스비와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그는 그 이후 더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라디오를 통해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대중들에게 쉽고 빠르게 전달되었으며 그의 팬클럽이 생겨 속 앓이 하는 십대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때는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했던 때, 그는 전쟁 채권(war bond) 캠페인에 참가하는 등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했다.



3. I’ll Never Smile Again



 
 이 노래는 루스 루이(Ruth Lowe)라는 캐나다 여성팬이 직접 그에게 보낸 사연을 바탕으로 작곡한 곡으로 제 2차 세계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남편을 생각하며 그를 보기 전까지 절대로 웃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이 개인적인 아픔을 맛봐야 했었으며 이러한 전쟁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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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언급했듯이 시나트라가 태어날 때 왼쪽 귀에 문제가 생겼는데 이로 인해 그는 신체검사에서 가장 낮은 등급을 받게 된다. 그러자 언론과 남성들은 그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아내와 여자친구들을 현혹한다고 반발했다. 그로 인해 그는 다시 신체검사를 받게 되고 거버너즈 섬 (Governors Island: 미 육군 요새지)으로 보내지게 된다. 남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지 않을까했던 우려와는 다르게 같이 지냈던 동료들로부터 가족에게 전화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고 시나트라는 무려 700통이 넘는 전화를 했다고 한다.

 아무튼 약한 귀로 인해 총알 소리로 귀가 먹을 수 있다는 결과를 얻고 최종 탈락 통지를 받은 그는 뉴욕으로 다시 돌아간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울었다고 하는데, 정말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안도의 눈물을 훔쳤을 거라 생각이 든다.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1945년 ‘닻을 올리고(Anchors Aweigh)’라는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데 한 번도 춤을 제대로 춰보지 못했던 그가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 엄청난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회적인 이슈에도 관심이 많아 가난, 이민 가정들, 즉 마이너리티에 속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보고자 했다. 재능이 있는 흑인을 발굴하는가 하며, ‘The House I live In’ 이라는 짧은 영화를 제작하여 인종차별에 대해서 사이다 발언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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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빠도 이탈리아에서 왔어.
그렇다고 해서 나도 아일랜드 혹은
프랑스 혹은 러시아에서 온
너의 아버지를 싫어해야 해?

My dad came from Italy.
But should I hate your father
because he came from Ireland or
France or Russia?”


 그러나 신은 공평한지, 그의 사회적 및 가수로서의 커리어는 대단했지만 그의 여성 편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엉망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여자, 저 여자 집적댔으며 장기적인 관계를 생각하기보다 현시점의 감정만을 중시하고 달려들었다. 어느 정도 였나면 어느 날 시나트라의 아내가 차에서 다이아몬드 팔찌를 발견했는데, 그녀는 당연히 자신에게 줄 선물이라 생각했지만 다른 여배우 팔목에 걸쳐져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보통의 여성이었다면 당장 이혼하자 했을 텐데, 그녀는 많은 스캔들이 있음에도 항상 그를 믿었다고 한다.



4. Try a little Tenderness



 
 시나트라가 인기의 최고점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언론들도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고 그 또한 에바 가드너(Ava Gardner)와 공개적으로 바람을 피기 시작하면서 가정과 커리어 모두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시나트라의 두 딸들과 아들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시나트라는 좋은 아버지였나요? 라는 질문에 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어려운 질문이네요,’ 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6개월 마다 집에 들어갔으니 자식들이 자라는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고, 게다가 아예 공개적으로 에바 가드너와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어 정이 별로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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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트라와 첫 번째 아내, 그리고 두 딸들과 아들의 모습)


언론들이 서로 다투어 그의 외도를 보도하자 그에 대한 투자도 줄어들었다. 그러자 그는 술에 살게 되었고 6년 동안 1천 억 달러를 벌었으나 세금도 못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생존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며 공연했던 그의 목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고 아무도 그에게 투자하려 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결국 백기를 들어 시나트라와 이혼을 하게 되었고 이혼을 한지 얼마 안 되어 시나트라는 에바 가드너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녀와의 결혼생활도 행복하지 않았다.



5. Angel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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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트라와 에바 가드너)


 에바 가드너는 가장 매력적인 할리우드 여배우였으나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할 정도로 좋은 아내는 아니었다. 에바 가드너는 누군가가 정복할 수 있는 여성이 아니었으나 시나트라는 그녀를 너무 애타게 기다렸다. 그녀는 그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고 그는 다시 또 슬럼프에 빠져 술에만 의존하게 된다. 미치 밀러(Mitch Miller) 등 다른 음악인들이 그가 다시 음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나 결과는 형편없었다. 시나트라의 노래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시도도 해보고 블루스에도 도전하는 등 그의 보컬 실력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오히려 더 나아졌지만 낮아진 평판으로 인하여 그는 바닥을 기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시나트라는 그 시기에 읽었던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를 보고 원작 영화에 출연해야겠다고 결심. 감독은 처음에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점점 그가 주인공 마지오와 닮았다고 생각하여 캐스팅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새롭게 다시 살기 위해 술을 끊었으며 캐피톨 뮤직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으면서 새 인생을 맞이한다. 게다가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통해 오스카상을 받게 되는 그는 바닥에서 다시 최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는 모두가 다 알다시피 그는 죽기 전까지 노래만을 위해 살았다. ‘마이웨이’도 그 이후에 나온 곡이고 그의 명성도 다시 안정되었으며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가수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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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영원으로' 장면 중, 오른쪽 끝이 시나트라)





 시나트라의 첫 번째 아내는 이렇게 얘기한다. 시나트라는 야망이 매우 컸으며 성공을 원하는 가수인 만큼 여성들도 많이 원했던 것 같다, 라고. 실제로 그의 삶을 보면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기도 했으나 그는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보컬 레슨도 받았으며, 아내가 처음 임신했을 때에도 잘 살기 위해 더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그의 야망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팝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야망에는 성공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했던 마이너리티에 도움이 되고자 했던 소망도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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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재기한 시나트라)


  그의 여성 편력은 한편으로 이해가 잘 안되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왜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주변에 수많은 예쁜 여자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 성공만을 달려왔던 그의 인생, 첫 번째 부인과의 가치관 차이 등 그는 자신의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곳을 찾고자 했다. 물론 외도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사람의 야망이 높아질수록 욕심도 높아지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에 그가 어리석은 인간의 길을 따랐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나중에는 다시 새로운 모습을 찾았으니,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재즈도 아니고, 블루스도 아닌 상업적 보컬로 성공했던 시나트라. 그의 삶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그는 운으로 다시 살아가게 되고 또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의 시대는 이미 오래 전,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그의 노래는 그렇게 빛바래선 안 된다. 부단히 노력했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의 노래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위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 HBO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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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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