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이 던진 모든 질문에 답한다는 것 [문학]

산도르 마라이, 「열정」
글 입력 2016.12.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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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년 7월 2일, 그날 사냥을 했지, 그의 웅얼거림이 침묵으로 이어졌다. 그는 시험 공부하는 학생처럼 책상을 팔꿈치로 받치고, 손으로 쓴 몇 줄의 편지를 다시 신중하게 응시했다. 사십일 년, 그는 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사십삼일. 그래, 정확히 그렇지. (…) 
 
“그러니까 그가 돌아왔단 말이지.”
그는 방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고, 큰소리로 말했다.

 “사십일 년하고 사십삼일 후에.”
사십일 년 사십삼일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그는 갑자기 피곤해 보였다.
산도르 마라이, 「열정」 10p-11p


 1899년 7월 2일은 헨릭(장군)과 그의 친구 콘라드가 함께 사냥을 나간 날이었다. 사관학교에서 같은 방을 쓰며 친해진 뒤 이 둘은 24년간 모두가 인정하는 친구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날, 콘라드는 사냥감이 아닌 헨릭에게 총을 겨눈다. 비록 그가 방아쇠를 당기진 못했지만, 헨릭은 친구가 자신을 쏘려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다음날 콘라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린다. 

 41년 그리고 43일이 지난 어느 날, 콘라드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소설은 시작된다. 헨릭과 콘라드 그리고 헨릭의 아내였던 크리스티나 사이의 비밀은 한 명을 고독 속에서 살아가게끔 만들었고, 한 명을 '열대'로 떠나게 했으며, 다른 한 명을 죽게 했다. 헨릭의 삶은 콘라드가 총을 겨눈 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의 배신, 그리고 곧이어 알게 된 아내의 비밀은 헨릭을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 헨릭은 지독한 고독 속에서 이전엔 맞닥뜨린 적 없던 질문들과 사투를 벌인다. '무엇이 콘라드가 나에게 총을 겨누고 떠나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키는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그 정열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간의 본성이란 그리고 우리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에로스의 불티'

 소설 『열정』은 돌아온 콘라드와 헨릭의 대화에 절반 가까이를 할애하고 있다. 사실상 헨릭의 독백에 가까운 이들의 대화 속에서 우리의 삶이 던지는 질문들이 드러난다. 

“우정 같은 것이”
그는 자신과 토론하듯이 말한다.
“과연 존재하는지 안다면 좋을 걸세. 나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특정한 사물에 대한 의견이 같거나 취향과 욕구가 비슷하기 때문에 만난 두 사람 사이의 일시적인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네.(...)우정은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결합이고, 그래서 그리 보기 드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간혹 있네. 그렇다면 그것의 원천은 무엇일까? (…) 모든 인간 관계 깊숙이에는 에로스의 불티가 존재하지 않을까.
140p

  헨릭은 무엇이 인간을 강하게 결합시키는가에 답하고자 했다. 그는 타인을 향해 발현되는 욕망, 에로스의 불티에 집중한다. 


 어느 해 여름 저녁 무렵, 그가 헨릭의 어머니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한 일이 있었다. (...) 그들은 쇼팽의 「폴로네즈 환상곡」을 연주했다. 방 안의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석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정중하게 듣고 있던 아버지와 아들(헨릭)은 어머니의 몸과 콘라드의 몸, 두 몸에서 무슨일인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지했다. (…) 「폴로네즈 환상곡」은 인간의 질서가 조심스럽게 은폐한 모든 것을 뒤흔들고 파괴할 수 있는 힘을 발산하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 
그날 저녁 단둘이 흡연실에 있었을 때, 그(아버지)는 아들(헨릭)에게 말했다.
“콘라드는 절대로 훌륭한 군인이 못 될 거다.”
“왜죠?”
아들은 놀라 물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이지.”
62p-67p


 '군인'으로 상징되는 헨릭과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콘라드, 크리스티나, 헨릭의 어머니는 '음악' 혹은 '열대'에 끌리는 인물들이다. 헨릭은 '다른 종류'였던 어머니 곁에서 외로워야만 했던 아버지의 운명을 자신이 그대로 따라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삶이 인간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고', 인간은 '삶에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태초에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의 근본 심성'을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한다. 콘라드나 헨릭의 어머니, 크리스티나의 '다름'은 태초부터 예견된 '다름'이었으며, 이는 그들이 헨릭에게 철저히 '타자'일 수 밖에 없음을 뜻한다. 
 
 이런 '다름'에서 헨릭이 찾아내는 것은 '에로스의 불티'다. 그는 '다른 종류'의 인간에게 느끼는 강렬한 희구(希求)가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키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헨릭과 콘라드를 묶어준 강한 감정 역시 여기에 그 원천이 있다. 인간의 욕망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타자'를 향하고, 인간관계는 '타자'가 존재할 때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타자'란 내가 알거나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헨릭에게 있어 콘라드나 크리스티나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모르는 상대, 나와는 분명 다른 존재다. 결국 에로스는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 지성)이 된다. 
 
 헨릭이 고독 속에서 늙어가야만 했던 이유, 그의 아버지와 똑같이 외로워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군인'이 바뀔 수도, '음악'이나 '열대'가 바뀔 수도 없었다. 그들의 결합은 서로에게 '타자'였기 때문이며 이 관계는 서로에게 '타자'였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헨릭은 이질적인 사람에게 에로스의 불티가 타오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서로 영원히 희구하는, 대립된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긴장이 세계 창조와 삶의 개혁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되묻는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

 
 세상이 던지는 질문들

  소설 속에서 헨릭은 콘라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대답을 기다리진 않는다. 
  
  “자네는 사실 삶으로 대답했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
-273p 
 

 세상은 언제나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여기에 대답하며 살아간다. 끊임없는 세상의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이다. 저자 산도르 마라이는 자신의 생애동안 목격했던 인간과 그 삶의 질문들을 소설 속에 담아내고 있다. 우리의 삶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질문들은 고독 속에서 이 질문들과 사투를 벌인, 한 늙은 남자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소설 속의 인물 '헨릭'의 대답은 한 인간의 대답인 동시에 독자들을 향한 '되물음'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모든 걸 희생시킨 그 정열에도 의미가 있는가? 삶이란 무엇인가? 


[이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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