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국 영화의 어제와 오늘 [문화 전반]

세대를 따라 살펴보는 중국 영화사
글 입력 2016.04.1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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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국 영화의 시작



1908년 베이징[北京]에서 촬영된 경극(京劇)의 실사(實寫) 필름에서 중국영화가 시작 될 당시 중국은 서구 열강들의 침탈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국 내에 조차권을 하나씩 가질 때마다 중국의 산업경제 체제와 정치권력 체계는 붕괴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중국 영화사에 반영된다. 1911년  만주왕조의 몰락 이전에도 미미하나마 중국인들의  영화작업이 있었다. 그러나 1911년 이전의 대부분의 영화제작과 상영은 외국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간혹 영화를 보여주었던 상하이 등지의 극장들은 모두 외국인 소유였으며,  최초의 영화전문관을 개장한 사람도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제작도  제임스 리칼튼(James Richalton)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1897년 에디슨의 단편 영화를 중국으로 들여왔고, 그 해의 에디슨 회사의 카탈로그를 위해 열 편 이상의 영화들을 찍었다.  이 초기의 작품들은 거의 기록영화나 뉴스영화였으며, 중국에서는 그 어느 것도 상영된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2.제 1세대의 시대(~1949년,중화 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초기 중국영화계에서는 경극의 내용을 다시 영화로 선보이거나 가벼운 코미디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해 미국인인 벤자민 폴라스키가 2명의 중국사업가와 합작으로 '아시아 영화사(The Asia Motion Picture Company)'를 설립해 본격적인 영화 제작을 선도하게 된다. 이 영화사가 만든 일련의 영화들은 막대한 중국인들의 새로운 볼거리로 부각되면서 선보이는 작품마다 알찬 수익을 거두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17년에는 상하이에 본부를 둔 외국 출판사가 중국 주요 도시를 연계해 영화 제작과 배급을 전담할 목적으로 '커머셜 프레스(The Commerical Press)'를 발족시킨다. 이 회사는 다큐물을 포함해 뉴스 영화, 오락물 등 중국의 일반 서민들을 단번에 끌어들일 수 있는 작품들을 연이어 제작해 공개한다. 



CP%20logo_Green.jpg▲ 커머셜 프레스 로고
 

1922년 중국인인 밍싱(Ming Xing)이 외국 영화 자본에 대항해 토속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영화사(Chinese Film Company)'를 설립해 운영주로 나선다. 이에 자극을 받아 다수의 군소 중국 영화사가 1920년대 중국 영화계를 이끌었고 이 시기에 공개된 무성 영화들인 <바다의 맹서 Sea Oath>(1921) <미인과 해골 Beauties and Skeletons>(1922) <고아 대부를 구출하다 Orphan Rescues Grandfather>(1923) 등이 흥행작으로 갈채를 받았다. 이어 사운드 영화의 도래로 중국 영화계는 신기술 도입에 따른 추가 제작비용 부담과 함께 수천 개의 방언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언어 환경에 맞게 각 지방어로 별도의 녹음을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영화사마다 막대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결국 이 같은 환경으로 각 지방 도시에서는 각 방언에 맞는 작품을 만드는 군소 영화사가 우후죽순으로 설립돼 영화계의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하기 시작한다.



3.제 2세대와 3세대의 시대(1949~1966,문화혁명 이전)



1950년 중국과 러시아는 합작으로 <중국 국민의 승리 Victory of The Chinese People>외에 <백발의 소녀 The White Haired Girl> <새로운 영웅 New Heroes and Heroines> <우 순의 생애 The Life of Wu Hsun> 등의 작품이 속속 제작, 공개된다. 하지만 지도자 모택동(毛泽东)이 영화에 대한 별다른 호감을 갖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영화 산업은 발전책에 별다른 특혜를 받지 못한다. 결국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공산당에 대한 선전 영화와 공산주의 이념의 위대성을 홍보하는 수준에서 맴돌고 만다.

하지만 점차 개혁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일단의 영화인들이 정부의 정치적 각성과 경제적 발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 성향의 작품은 물론 영웅적인 중국 역사 인물에 대한 공적을 다룬 사극을 제작하면서 점차 개혁의 분위기를 조성해 나간다. 1964년에 이르러서는 장편 480편, 3,000여 편의 뉴스물, 1,400편의 과학물, 200여 편의 만화영화 등이 공개돼 양적으로 보면 영화 강대국의 일면을 보여 주었다. 



4.제 4세대와 5세대의 시대(1978~,문화혁명 이후)



1978년 이후로는 문화혁명과 개혁, 개방의 혼란기를 겪어 시대정신이 강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사회변화로 인해 파생된 인간관계의 모순, 여성의 지위문제, 새로운 혼인양식, 세대 간 의 상호를 반영하였고 단절, 현실적 삶에 근거한 사실주의를 추구하였다. 또한 주로 중국 근대사를 다룬 영화들과 각종 오락영화가 제작되었고 10년이 넘게 금지되었던 소재들, 특히 사랑을 다룬 영화가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이 시대의 대표작으로는 첸 카이거의 <황토지>, <아이들의 왕>, <대열병>, <패왕별희> 황 지엔신의 <흑포사건>과 <속 흑포사건> 등을 들 수 있다.


f4344a4cdc4c7fac1f0684b8297cfe8d.jpg▲ 첸 카이거 <패왕별희>



5.중국 영화의 미래



제5세대는 우리가 현재 ‘중국영화다’라고 말할 때 지칭하는 세대이다. 지금의 제6세대들은 90년대 언더그라운드적이고 전위적 기법, 사실주의 기법의 또 다른 전환을 도모하고 있어 영화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각지방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최신 영화나 정부 홍보 드라마 등을 상영해 주는 이동 극장 운영요원을 근10,000여 팀 이상 파견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이동 영화 팀들은 중국 공식언어인 만다린어에 대한 해독이 어려운 지방 토착민을 위해 영화 상영시 장면을 해설해 주는 변사 노릇과 예비 영화 애호가들을 위한 기계 조작이나 영화 이론 등을 지도 하는 등 문화 전령사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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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비가 450억이 투입된 장예모 감독의 "황후花" 속 주걸륜의 OST



[우정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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