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 아이에게

세월호 2주기다.
글 입력 2016.04.1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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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2주기다.
 
리뷰를 쓰려고 켠 노트북 화면에는 커서가 반짝이고
내 손가락은 자꾸만 키보드를 문지른다.
무엇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잘 모르겠다, 라는 말만 자꾸 썼다 지운다.
 
언어의 시간은 감정의 시간 이후에 온다고 말한 친구가 있었다.
아직 나에게 이 연극은, 감정의 시간 속에 있나보다.
그래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애꿎은 엔터만,
쳐댄다.
 
숨 쉬기도 미안하다는 어머니와,
시신을 찾은 부모에게
축하한다고,
아이가 돌아와서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부모가
무대 위에서 망그러진 가슴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았다.
모든 연극이 그러하듯
연출이 완벽한 것도,
연기가 완벽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농도의 슬픔을 느낀 이들의 입술로만 이야기될 수 있는
무게감이 있다.
‘내 아이에게’는 허구가 아니다.
정말 가슴을 부여 쥔 사람들이 극 뒤에 있고,
또 관람객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 무대를 마주한다.
연극을 매개로 우리는 그들을 만난다.
그들의 아픔을 만난다.
 
대부분의 연극은 거울이다.
연극은 허구의 이야기이며, 그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의 감정들과 느낌들을 이해해 나간다.
우리는 연극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배우들이 울고 웃는 모습에서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본다.
그러나 이 연극은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관람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내 아이에게’는 거울이 아니라 창문이 된다.
창문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세상을 내다보고,
그들의 눈물 앞에서 함께 운다.
 
연극을 보고 눈물에 퉁퉁 불은 눈으로 위와 같이 휘갈겼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을 만큼 두서 없고 두루뭉술한 글이다. 일주일이 지난 오늘에서야, 아래와 같이 리뷰를 쓴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를 기억한다. 뉴스 속보 앞에서 손을 덜덜 떨다가, 안도하다가, 줄줄 울던 우리 어머니의 모습도 기억한다. 가슴을 쥐며 통곡하는 부모들을 스크린 너머로 보면서 나도 눈물을 흘렸고, 가슴이 무거워 주먹으로 탕탕 심장께를 쳤다.

4월은 무거운 달이었다. 나는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달고 다녔고, SNS에서 마주치는 세월호 소식들을 외면하지 않으려 애썼다. 세월호 특별법 시위에 참여했고, 세월호 1주기에는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그 와중에 내심 세월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공감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그런 생각이 ‘내 아이에게’를 보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들의 슬픔이 새하얀 알몸으로 드러난 무대에서 나는 내가 어디까지나 관찰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과 공감한다, 그들의 편에 서 있다, 라는 말들은 어디까지나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그들이 느낀 참혹함의 무게 앞에서 내가 그저 자신에게 버겁지 않을 정도만 세월호에 발을 담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세월호 안에 침몰해 있었고, 나는 수면 위에서 세월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추워지면 바로 육지로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사고 피해자의 당사자들이 느꼈을 그 절박감과 통곡의 농도를 난 털끝만치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같은 시점을 살아나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만큼의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내가 감수성이 넘치고 공감을 너무 잘 해서 탈인 사람이라고 여태까지 생각해왔다. 참, 어이없는 착각이다.

시신을 찾은 가족이 팽목항을 나서면, 그들이 앉았던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했다. 운이 좋다는 소문 때문이다. 그 곳에 앉으면, 딸의 시신이 조금이라도 빨리 올라올까 해서, 그렇게 계속 자리를 바꾼다 했다. 바닷물이 너무 차서, 딸이 추울까봐 걱정이 된다 했다. 숨 쉬기도 미안하다 했다. 그들의 말에서 단순히 ‘아이를 잃은 슬픔’이라고 추상적으로 이름 지어져 있던 슬픔이 형태를 갖추고 피부에 닿아 오기 시작했다. 자리를 바꾸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도 ‘혹시’라는 말을 되뇌이면서 바꿀 수밖에 없는 절박감이, 가슴을 쾅쾅 쳐댔다.

연출이 어떠했고, 어떤 소품이 어색했고, 따위의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연극에는 그들의 입술로만 이야기될 수 있는 짙은 감정들이 있었고, 그 감정 하나만으로도 연극은 볼 가치가 충분했다. 나에게 닿아 있는 세월호와, 그들에게 닿아 있는 세월호는 다른 온도를 지녔다. 그 온도의 차이는 조금쯤 부끄럽고 아렸지만 내가 깨달아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아마 그 차이는 세월호 문제에서만 있는 것이 아닐 터였다. 모든 억압의 문제에서, 난 그 억압의 당사자만큼 사안에 예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당사자들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저 사람은 이러한 아픔을 느끼겠지’라고 막연하게 추측하는 것과 그들이 실제로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좌절감은 그 농도가 다를 것이 뻔하다. 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억압의 문제에 민감해야 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 세월호 밑바닥에 침몰해 있을 수는 없다. 없고, 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침몰해 울고 있는 이들이 있을 때 적어도 배에서 내려 몸을 그 물에 푹 적시고 그들의 손을 잠시라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싶다. 


내 아이에게 - 포스터(레이아웃)고화질-01.jpg
 

[이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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