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술적 복제로 인한 예술작품 속 아우라의 붕괴, 그 의미의 변화 [예술철학]

발터 벤야민의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을 읽고
글 입력 2016.01.1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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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라’의 의미 변화
 
  벤야민은 인류 역사를 시대별로 구성하면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예술을 종교 의식적 기원에 비추어 정의한다. 자율적이며 관조적 수용의 대상인 예술 작품은 그 유일무이성을 바탕으로 하여 원래 예술 작품을 규정했던 신학적 함의를 여젼히 내포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함의의 내용을 ‘아우라’라고 일컬으며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먼 곳의 일회적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전래 예술은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항상 이해되지는 않았던 것, 즉 세속화되어 어둠에 가려진 신적 현상으로 파악된다. 이에 대해 최근의 예술적 방법론의 분석(브레히트 서사극과 채플린의 그로테스크한 영화 예술)에서 출발하는 벤야민의 명제들은 예술을 완전히 세속화된 매체로, 즉 정치적 혁명의 매체로 파악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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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야민은 전통예술의 위기와 현대예술의 등장을 진단하면서 각각의 특징을 ‘아우라’와 ‘아우라의 몰락’이라고 규정했다.
‘아우라’는 어원상으로 ‘오로라(aurora)’에서 파생된 개념이다. 그리고 희랍어로는 본래 ‘숨결의 분위기(Hauch-Kreis)’라는 의미를 갖는 아우라는 먼 곳에 있는 대상이 그 대상을 보는 사람에게 와 다는 숨결과 같은 교묘한 분위기를 뜻한다. 또한 사전에 따르면 ‘영기’, ‘신비스러운 효력’, 또는 ‘신비스러운 분위기’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중세 유대교의 비설인 카발라(kabbala)에 따르면 사람의 주위를 감싸고 있고 사람이 최후의 심판까지 보존하고 있는 어떤 정기라는 종교적은 의미도 지니고 있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아우라’란 예술작품에 대해 수용자가 느끼는 교감작용인 것이다. ‘아우라’는 지금 여기서 유일하게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밀로의 비너스>상은 루브르 박물관에 하나밖에 없고, 만일 내가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서 <밀로의 비너스>상을 보고 있다면 이 순간에 단 한 번만 있을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아우라는 지금 여기에 유일하게 있다는 “일회적 현존성”이다.
 
  벤야민에게 아우라란 전통예술과 현대의 기술복제 예술을 구별하는 핵심이며 다시 말해 과거의 전통예술 작품에서 풍겨 나오는 아름다움을 큰 의미에서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아우라란 예술작품에 대한 수용자의 교감작용을 내포한다. 즉 일회적 현존재로써의 에술작품에 대해 느끼는 수용자의 교감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라의 몰락’이란 아우라의 반대 의미로 이러한 일회적 현존성이 사라진다는 뜻이며, 동시에 예술작품에 대한 수용자의 교감작용도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아우라의 몰락’은 기술복제라는 변화된 생산조건에 따른 산물이다. 기술복제는 예술작품을 대량생산함으로써 일회적 산물을 대량 제조된 산물로서 대치시킨다. 그리고 수용자에게 반복적으로 복제품을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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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작품의 의미 변화
 
  예술의 수용 가치에는 제의가치와 전시가치로 두 가지 극단적인 차원이 있다. 예술의 제의가치를 떼어내는 일, 즉 대상의 표피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를 해체하는 일은 기술복제 시대의 당면성이라고 부각시키고 있다. 벤야민이 말하는 전시가치로의 전환 양상은 원작의 가치 중요성이 변환되고 수용자인 대중의 요구와 참여 태도가 바뀌는 것, 그리고 복제의 반복성과 촉각적 수요의 증가에서 찾을 수 있다. 전시가치로의 변환은 예술품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가 기술적 복제에 의해 사라지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원시시대 동굴벽화에 그려진 짐승은 일종의 주술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종교의식 가치가 예술작품에 남아 있길 희망하지만, 장소의 변이와 대상의 전시 기회를 복제품이 많이 획득함에 따라 전시가치가 양적인 우위에 서게 되고 제의가치는 위기를 맞게 된다. 또한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로 바뀌게 되고, 예술은 전혀 새로운 기능으로 전환된다.
  또한 예술작품의 복제를 통해 대중들에게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많이 제공하면서 감각적 이미지 수용을 민주화했다. 제작, 생산, 수용의 민주화를 통해서 대상에서의 아우라를 배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용차원에서 전시가치의 확산이 대중에게 예술의 가치가 보편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비함, 범접할 수 없는 어떠한 것, 숭배의 대상, 경탄을 자아내는, 유일한... 등의 전통적인 예술의 가치(아우라)인 제의가치에서 말 그대로 전시(display)하여 디자인과 색상 등 감각적인 기준으로 드러내는 전시가치로의 변화는 예술작품에 확연히 나타난다.
 
  벤야민은 제의가치와 전시가치를 대치하는 정신집중과 정신분산이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청제적인 구성유소, 콜렉션 등 작가의 의도를 나타내는 정신집중과 통일성 없이 분사되어 임의대로 제각기 결정하는 사용자 중심의 정신분산은 각기 제의가치와 전시가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예술작품도 작가, 예술가에서 나아가 관람객과 사용자, 아마추어 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앞서 아우라를 동일한 대상이 다르게 느껴져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이 하나만, 한번 밖에가 아닌 것으로 확장되었다. 진짜 아우라는 일상생활에서의 재발견이며, 멀리 예술작품이 아니라 근처의 것에 대해 감각적 향유가 이루어짐에 따라 아우라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디지털 복제기술은 단순한 숭고성과 신비성의 추락이 아닌 새로운 분위기를 창출해애며 일상생활 우리의 삶과 체험 속에서 재발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의미변화의 예시로 문학과 미술 작품을 들어 설명해보겠다. 
 
 
➀ 문학 (시 : 김춘수 <꽃>,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의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은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김춘수의 <꽃>은 ‘존재 탐구’에 대한 작가의 존재론적 가치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고뇌를 다룬 전형적인 서정시이자 문학작품이다. 그에 비해 장정일의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은 가볍고 표면적인 것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깊이 없음’의 태도로, 하나의 산뜻한 재치를 보여주고 있는 언어유희의 작품이다. 빠르게 변모해가고 있는 소비사회의 문화적 특징을 반영하면서 풍자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장정일은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에서 반영하고 있는 것은 표절 혹은 노골적인 베끼기로 원작이 성취한 ‘명시성’의 획득에 대한 도전이었다.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은 “원본의 권위와 성과”를 벗어나서 제 나름대로의 ‘명시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전의 기법적 난해성이나 주제의 진지성이 사라진 대신에, 콜라쥬와 같은 파편화된 형식을 통해 회화화하고 개인의 거친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표출시킨다.
 
 
➁ 미술 (레오나르도 다빈치과 마르셀 뒤샹의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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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셀 뒤샹은 그 자신이 ‘레드 메이드(기성품 Ready-Made)'라고 부른 그와 같은 일상 사물을 취해 거기에 자신의 서명을 하여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은 작가이다. 그는 1917년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성 소변기에다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앙테팡 전시회에 출품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 엽서에 턱수염과 콧수염을 첨가해 라는 이름으로 출품하였다.
  이 작품들은 기존의 가치에 대한 반 예술 행위이고, 기능적인 오브제와 예술품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문제 제기로서 기존의 가치에 대한 해체이면서 풍자였다.
 
  발터 벤야민은 대량으로 재생산되는 예술작품에서 상실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푸 자체의 아우라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예술작품은 피할 수 없는 재생산의 운명 속에서 원본의 지위를 읽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은 <모나리자>를 보고 있으면, 여자의 마음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우리들의 눈 앞에서 볼 때마다 달라져 보인다. 미소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오묘한 느낌이 들고 눈을 유심히 살펴보면 자신보다 아랫사람을 바라보는 듯하다. 이런 작품을 그림 엽서로 대량생산 하였을 경우 <모나리자>의 작품 자체가 가진 아우라와 원본의 지위를 상실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마르셀 뒤샹은 <모나리자> 그림 엽서에 턱수염과 콧수염을 첨가함으로써 상실된 아우라를 복원한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에서 복원된 아우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아우라이다.
 
  <모나리자>의 그림 엽서는 상점에서 돈만 지불하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기능적인 오브제이다. 그런 기능적인 오브제는 예술품이 가진 원본의 지위와 아우라를 상실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모습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그 시대의 패러다임에 가두어 의미를 한정할 수도 있다. 곧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면서 당연히 그녀의 미소에 대한 예술작품의 가치에 대한 의미를 감상해야 하는 듯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마르셀 뒤샹은 그녀의 모습에 숨겨져 있는 남성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이런 행동은 유명한 작품은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관습적인 인식의 사고를 해체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마르셀 뒤샹은 턱수염과 콧수염을 첨가해 “Elle a chaud au cul(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라는 뜻의 약자를 쓴 것은 기존의 권위를 해체하는 행위인 동시에 풍자였던 것이다.
  <모나리자>의 그림 엽서는 획일적이고 똑같은 모습으로 대량생산된 상품이다. 그런 그림 엽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처럼 많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마르셀 뒤샹의 그림 엽서인 <모나리자>는 기능적인 오브제를 벗어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바라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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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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