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하퍼 리건 - 거짓말을 그만두기로 했다'

인간에게는 눈이 있다. 그러나 눈 두 쪽을 달고 있더라도, 때때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어진다.
글 입력 2015.12.30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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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갈 기회를 얻어, 감사하면서도 들뜬 마음을 가지고 극장으로 향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이 공연 시작 전부터 길가에서 연극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표소 근처에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 안에는 한 여인이 길가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지쳐 보인다기엔 선이 굵어 보이는 눈빛. 날이 져서 어두웠지만 큰 연극 포스터 속의 여인은 오히려 뚜렷해 보였다. 오늘 나는 이 공연에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어떤 얼굴들을 보고 올 것인가. 저 여인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일까. 설렘 반 긴장 반으로, 연극의 막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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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어떻게 보면, 조금 당황스럽고 조금 놀라웠으며 조금 난해했다. 평소 가볍고 발랄한 주제의 연극을 보아왔던 터라 표현이나 대사가 내게 낯설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인 하퍼 리건의 삶은 직장인, 주부, 엄마의 모습으로, 내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연극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우선 배우 분들의 연기가 정말 놀라웠다. 표정, 눈짓, 그리고 숨소리와 침묵마저도 몰입감이 있었다. 캐릭터들도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매 순간 무대가 꽉 차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나를 연극에 집중하게 만들었던 점은, 연극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결국 한 여인의 ‘삶’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직장인이자, 주부이자, 엄마였다. 하지만 그녀는 욕망과 의지를 가진 한 인간이기도 했다.
 


하퍼 리건, 그녀가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에게 찾아가려 하는 것으로 연극이 시작된다. 휴가 문제로 상사와 크게 다투지만 결국 휴가를 얻지 못한 채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던 와중 하늘에서 갑작스레 떨어진 벽돌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정말 죽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과 함께, 언제든 인간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삶의 막막함과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무작정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고, 절망한 하퍼는 술집과 호텔을 전전하며 이전에 하지 않았던 행동들을 해버리고 만다. 말 그대로, ‘해버린다’. 죽음에서 오는 허무감을 마주하고 막연한 공포를 회피하려 함과 동시에, 아마 그녀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자기가 살아온 삶을 반추해 보지 않았나 싶다. 삶은 이렇게 갑작스레 끝이 난다. 그러나 자신은 이 삶을 솔직하게 살았는가. 그녀는 이 상황을 겪으며 억눌려있던, 혹은 숨겨왔던 욕망과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가죽 자켓을 입고 술병을 들었다. 낯선 남자와 만나기도 한다. 지금까지 숨겨온, 아동 성범죄자로 오인받은 자기 남편 얘기를 해보기도 하고, 그와 호텔 방에 들어서 몸을 겹치기도 한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다음날 뒤늦게 하퍼는 자신의 어머니를 만난다. 이 이전에 그녀가 욕망을 직면했다면, 어머니와의 만남은 어떠한 사실을 직면하게 만든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사랑해왔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듣는다. 자신이 몰랐던, 혹은 모르고자 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 문제, 자기 남편을 범죄자라고 생각한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는 사실 등등. 아니라고 소리쳐 보지만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퍼 본인이었다. 어머니와의 대화는 하퍼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상처를 갈무리할 방법도 남겨 주었다. 사실을 마주하는 것. 하퍼는 자기 남편의 과거를 떠올리며, 남편은 아동 성범죄자로 오인받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딸에게 말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거란 뿐이야.” 그리고 다시 완벽하게 일상의 모습을 한 풍경 안에서, 하퍼는 남편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남김없이 얘기한다. 일상의 풍경이 비일상적으로 위태로워지나 남편은 애써 다른 얘기를 잇는다. 우리의 내일, 우리의 미래는 행복할 것이라고.
 
연극 하퍼 리건은 하퍼라는 여인의 짧은 일탈을 통해 진실과 거짓의 문제, 인간의 욕망,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가족에 대한 것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상황을 맞닥뜨린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나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아주 쉽게 진실을 외면한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때때로 거짓을 진실처럼, 진실을 거짓처럼 필터링해서 받아들이는 능력. 그러나 사실 본질적으로는 우리 내면을 나약하게 만들 뿐이다.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언젠가 벗겨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극의 마지막 장면은 조금 직설적이기까지 했다. 진실을 얘기하는 하퍼와 동문서답하는 양 더 나아질 내일을 얘기하는 그의 남편. 사실 진실을 속으로 인정하는 것과 밖으로 얘기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하퍼는 본의 아니게 남편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고, 남편은 하퍼에게 갑작스레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남편은 자신의 진실과 진심을 온전히는 꺼내지 않는 대신 가족으로써의 태도를 취한다.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더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그런 것이다, 라고. 이 이전에 나타난 극 중 여러 장면에서도 기묘함을 느낀다. 극 중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오히려 낯선 사람들에게서 뜻밖의 친밀감을 느끼는 기묘한 모습. 가족이 가장 가까운 관계지만 오히려 가장 멀게 느껴지고, 가장 모르는 게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그 기묘한 모습. 그러나 끝내는 난 널 사랑해왔어, 우린 함께할 거야, 하는 그 기묘한 모습. 가족 사이의 관계를 포함하여 더 넓게는 지나쳐가는 여러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과, 그 안에서 발견되는 한 여인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만났어야 한다는 점일까.



인간에게는 눈이 있다. 그러나 눈 두 쪽을 달고 있더라도, 때때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생각과 마음에도 눈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붙어서 마음 안쪽을 본다.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인다.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보아야 전체가 보이는 법이건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을 저지른 후 숨기지 않고 솔직히 얘기하면 다 되는 것인가, 라는 류의 얘기는 분명히 아니다. 단지 이 연극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양심에 거짓이 없이 솔직한가가 중요한 요점이라고 생각된다. 객관적인 상황이든, 자신의 깊은 내면의 생각이든 간에 그것을 똑바로 보고 인지했다면 그 때 비로소 스스로에게 올바른 반응이 나온다. 그리고 그 마음이 스스로를 더 나은-명료한 세계로 성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망쳐서 이룰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이를테면 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하루로 하퍼가 얻은 자아란,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자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일 테다.
 
조금 어둡고 힘들고 지치는 여정이었지만, 희망적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하퍼가 자신의 진심을 어디서 찾았는지 생각하면 된다. 그녀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얘기를 듣고 여러 얘기를 하고, 또 진실을 마주하여 삶의 모습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했듯이, 우리도 끝없이 반복될 것만 같은 이 삶 속에서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그렇다. 나, 그리고 나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 모든 것을 둘러싼 거대한 삶의 풍경. 우리는 항상 거대한 해답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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