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메리카의 유령들 - 레이몬드 카버 소설집 < 제발 조용히 좀 해요 > [문학]

글 입력 2015.02.01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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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조용히 좀 해요』/ 레이먼드 카버/ 손성경 옮김 / 문학동네




현란한 광고판들이 연신 번쩍이는 타임스스퀘어의 복판을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무심한 듯 어깨에는 검정 모직 코트를 걸친 채 당당하게 거니는 뉴요커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우리에게 조금도 어렵지 않다. 빛나는 쇼윈도가 줄지어 이어진 거리와 고공을 향해 끝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솟아있는 빌딩 숲의 이미지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꼬리를 물고 반짝이며 이어진다.



그곳에 선 모두는 무던히 결함이 없고 유쾌해서, 메스미디어를 통해 차곡차곡 축적한 우리의 아메리카 드림은 그 어떤 연상보다 아름다울 따름이다. 하지만 웬걸,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시선이 조명하는 미국은, 그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들은 그리고 그들을 마주하는 일은 말끔하게 발려 있어야 할 벽지가 어딘가 아무렇게나 뜯겨나간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 보아야 하는 일처럼 불편하게 짝이 없다. 실직, 불륜과 이혼 따위의 상황이 이들의 삶의 현재를 수식하거나,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들조차 출발점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존재들은 이때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마음을 숨긴 채 일상을 영위한다. 들어내는 법이 없어서 새파랗게 곪는다. 이렇게 영위되는 관계에는 참으로 별일이 없어서 섬뜩하다.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는 존재들은 저마다 결핍을 안은 채 분절되고, 대화의 양상은 항상 불통이 지배한다. 



"어머나, 세상에! 이게 뭐야? 뱀이잖아! 이게 뭐니? 제발, 제발 갖고 나가, 나 토하기 전에."

"갖고 나가! 엄마 말 못 들었어? 당장 갖고 나가!"

아빠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보세요, 아빠. 이게 뭔지 보라구요."

"보고 싶지 않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中



양옆에 선 존재들은 서로를 겉돌며 좀처럼 가까워지는 법이 없고, 어느 순간에는 오히려 잘못 걸려온 누군가의 전화가 더 반가운 일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이성복의 시 <그날>의 한 구절이 선명해진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사소한 일상을 부단히도 이어가는 이 가장 보통의 존재들은, 어떤 강력한 개성을 지닌 인물로 산출되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은 종잇장보다 얇고 투명해서 그것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우리의 얼굴을 비춘다. 현대인의 초상이 선명하게 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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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타인은 욕망을 출력하는 프린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카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조금도 스스로 욕망하는 법이 없다. 욕망하지 않으니, 관계에 대한 욕망 역시 존재할 길이 없다. 이들은 대신 이 빈 욕망의 자리에 정형화되고 만들어진 욕망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았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단란한 가정과 마른 몸매에 대한 집착 따위의- 실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이 거세된 욕망의 자리를 차지하고 선다. 「그들은 당신의 남편이 아니야」에 등장하는 남자가 아내의 몸매를 비웃는 남자들의 멱살을 쥐지 않고, 아내에게 살을 뺄 것을 강요하는 것은 타인의 욕망을 따르고 있는 까닭이다. 욕망하지 않는 개인들은 서로에게서 잘게 분화되면서 동시에 개별성조차 상실한다. 욕망이 상실된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실추된 개개인의 욕망이 실상 설 자리에는 미국의 전방을 이끌어가는 소비사회라는 거대한 축이 굳건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공장에서 끊임없이 찍혀 나오는 상품들은 그것을 소비해줄 더 많은 소비자를 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정형화된 욕망을 함께 생산될 필요성이 있다. 이 시각에도 우리를 쉼 없이 현혹하는 광고들은 우리에게 정형화된 욕망을 주입하기 위해 힘쓴다. 그것은 깡마른 체형, 단란한 가정 -멋진 독신은 없다- , 향후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대한 대비가 있는 삶 따위가 훌륭한 욕망이라는 듯 욕망을 주입한다. 여기에 까다로운 소비자는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유행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소비자만이 있을 뿐. 


지정된 욕망은 소비된다. 자급되지 않는 욕망 속에 실상 스스로 욕망하지 않는 자아는 물안개처럼 창백하게 본연의 얼굴을 잃는다. 정형화를 쫓으며 구분되지 않는다. 정형화된 욕망은 실상 허깨비처럼 얇고 깊이가 없지만,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 우리를 들여앉힌다.



카버의 소설을 덮으며 질문 하나가 선명하다. 타인의 욕망에 우리가 모두 충실할 때, 우리의 삶은 과연 ‘성공적인’ 삶이라 정의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대체 성공이라는 건 대체 뭘까. 아메리카의 유령들은 케이크에 촛불을 꽂고 둘러서 웃으며 여전히 행복한 걸까.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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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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