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0. 일상에 대한 애증의 절규 '지나간 생각의 잔해 분포도' [기타]

글 입력 2018.03.03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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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생각 분포도'는
예전에 가졌던 개인적인 관심을 돌아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입니다.



- 이 글에는 사진이 없습니다. 있으면 안될 것 같이 그리 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일상에 대한 찬가를 부르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잘 모른다. 고등학생 때 일까? 그때는 비일상에게 바치는 찬가를 우렁차게 불러재낄 때다. 대학 와서일까? 그것보다는 전인 것 같다. 그러면? 뭐 이미 잊어버린 시작을 여기에 풀어봤자 무의미할 것. 어쨌든 나는 일상을 참 좋아한다. 일상을 좋아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일상이라는 시간의 틀을 참 좋아한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좋고 싫음, 좋고 나쁨, 희망참과 불길함 등은 다 일상이라는 틀에서 나타난다. 그러기에 일상이라는 틀은 언제나 그래왔던 감정들을 붙들어주는 일종의 장치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하지만 일상이 일상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면 좋았던 것이 좋지 않게 되고, 사랑하던 것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하지만 일상은 시간의 틀에서 탈출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든지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을 점령하는 일들을 우리는 일상과 비일상으로 칭한다. 하지만 비일상은 일상이 있을 때 성립된다. 비일상이 계속되면 비일상은 일상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일상이라는 타이틀을 잃어버린 기존의 일상은 비일상이 될 것이다. 결국 일상이라는 것은 시간의 틀에서 탈출하지 않는다. 단지 변화할 뿐이다. 우리가 일상과 작별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 단 하나뿐이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시간축에서 나를 지울 수 있으니까. 따라서 일상과의 재회는 불가능하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나무에 달린 신의 아들이 아니니까.

 일상은 집과 같다. 비일상이 성립되고, 일탈이 성립되는 것은 돌아갈 수 있는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 특별한 것은 돌아갈 장소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고정된 장소는 집이라는 물리적 장소인 동시에 일상이라는 추상적 장소이다. 그러기에 여행은 일탈로 존재할 수 있다. 만약 돌아갈 집이 없는 여행은 여행일까? 이견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보통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집이 없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단어 중 하나로 ‘난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러기에 돌아갈 곳이 고정되지 않은 사람은 뉴스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돌아갈 일상이 없는 사람들도 그렇게 난민이 되어간다.

 한동안 난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난민이 될 예정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난민이 될 예정이라는 것은 단어 그대로로 존재해주지는 않았다. 바뀔 것이라고 확정된 일상은 지금까지 일상을 다 찢어발기려고 애를 썼다. 2년이라는 시간동안 일상의 무대가 되던 곳과 작별을 했다. 작별을 하기 전 장소와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인사를 나누기로 결심했던 날은 너무 추웠다. 참 바보 같은 인사 계획이었다.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가는 날씨에 2시간동안 걸어간다는 결심을 아무런 준비 없이 하는 바보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특별한 의식도, 기도도 없이 일상의 무대에 내려왔다. 어느덧 방을 비우는데 숙련이 되어버린 나와 함께.

 무대 다음은 사람이었다. 사실 이미 일상의 사람들은 한명씩 사라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20대 남성이 항상 동일한 일상을 누릴 수 없는 국가이니까. 그래도 많은 사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과 장벽을 세우게 된다는 것은 자명했고, 난민에게는 그것이 자명함을 깨달을 틈조차 없었다. 오늘날에 물리적인 거리를 가지고 장벽이라 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야기일 것이다.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는 것으로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이동을 할 수 있는 시대이니까. 하지만 사람은 보지 않는다면 멀어지는 법이고, 나라는 사람은 그 멀어짐을 막을 만큼 정상적인 사람이 되지 못했다.

 이제 무엇을 더 가져갈거니. 난민이 되어버린 나에게 무슨 일을 더 휘두를꺼니. 하지만 이어지는 일들은 약탈이 아니라 제공이었다. 새로운 무대와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무대는 너무나 거대한 괴물이고, 이 괴물의 습성을 난 하나도 알지 못한다. 새로운 사람들은 장벽 너머에 있다. 갑자기 들어온 낙하산에게 장벽은 당연한 잔인함이 아닐까. 새로운 학교와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 사이에 갑자기 떨어져버린 나는 완벽한 난민이 된다. 집이 되어주던 일상은 없다. 그리고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 가져온 변화만을 증오하며, 변화를 불러온 자신은 증오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난민이 되어가면서 3주 넘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일상은 난민을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허락하신다. 그 은혜로 사람은 새로운 집을 찾게 된다. 그 은혜는 바로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은 난민의 지위로 밟고 있던 땅을 당당히 자신의 집으로 선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이것을 적응이라고 부른다. 앞서 말했듯이 일상은 절대 시간을 탈출하지 않는다. 단지 변화할 뿐이다. 그리고 적응은 이 변화를 지나가버린 과거로 만들어 버리고, 그 전에 살아오던 일상을 망각의 영역으로 보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난민과 정착민을 오가는 존재들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역마살이 끼어버린다. 일상이라는 역마살의 숙주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하게 타향살이를 이어간다. 이 난민생활도 끝이 날 것이다. 개강을 했고, 새로운 학교에서도 들어야 할 수업들이 있으며, 그렇게 새로운 땅에 적응할 것이다. 새로운 타향살이를 시작할 것이다. 이제 고향이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타향살이를.

 이런 끊임없는 타향살이 속에서도 나는 일상이 좋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저 일상이 좋다.


[김찬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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