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겨울로 가기 위해 사는 밤, 그리고 시(時) [문학]

글 입력 2017.11.12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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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라고 칭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만 같고, 또 그렇다고 해서 겨울이라고 이 계절을 말하기엔 너무 성급한 판단인 것만 같다. 올해는 유독 가을다운 순간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흘려 보낸 것만 같아 더욱 아쉬워, 뒤늦게 시간을 붙잡아 봐도 그것은 어느 새 저만치 멀찍이 앞서서 뛰어가고 있을 뿐이다. 결국엔 바람이 차갑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은 또 다시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걸친 초겨울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기분 좋게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트렌치코트를 걸치기 딱 좋은 가을날을 일컬어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지만, 사실 그런 날씨에 실내에 앉아 가만히 책을 읽는 것은 어쩐지 아까운 기분이 든다. 기분 좋게 선선한, 그래서 바깥 나들이를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딱 적당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에게는 실내에 있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는 요즈음부터가 진짜 ‘독서의 계절’이다. 앞선 계절에 밀려 잠시 묵혀두었던 것들을 조심스레 다시 꺼내어 본다. 기분 좋은 포근함을 도와줄 수면양말을 꺼내 신고, 담요를 허리춤에 두른 채 책꽂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선 마음 가는 책을 골라보는 것이다. 여기에 따뜻한 차나 커피까지 있다면 더욱 좋다.

 그런데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왠지 이 애매한 계절에는 시집을 읽기가 한결 수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초겨울에 읽는 시에서는, 각각의 시어들이 지닌 밀도가 다른 계절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 단어 하나 하나가 읽는 이에게 주는 그 사유의 무게가 너무 가볍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해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무겁지도 않다. 아마도 이 계절만의 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노래 제목처럼, ‘겨울로 가기 위해 사는’ 딱 그만큼의 사유를 하기에 적당한 날들이기에.

 그리고 이 무수한 시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이 계절의 온도를 닮은 시들이 있다. 쌀쌀하거나, 혹은 쓸쓸하거나. 단어에게서 갈색의 빛이나 포근한 느낌의 연한 회색 빛이 나는 것만 같은 그런 시들 말이다. 책장을 넘기다가 그런 몇몇의 시들을 만나는 순간, 읽는 이의 ‘딱 그만큼의’ 사유는 이윽고 더욱 풍성해지고, 시를 읽는 일은 더욱 행복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소개할 초겨울을 닮은 시 몇 편의 서늘한 시어들을 통해 잠시 묵혀두었던 사색의 시간을 계절과 함께 꺼내어 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아까 말했듯이 옆에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1. 이병률- 고양이가 울었다


검은 봉지를 형제 삼아 지내온 날들
고양이가 울었다
잠든 형제를 위해 자꾸 자리를 비켜주던 날들
뼛속으로 뼛속까지 바람이 불었다

-‘고양이가 울었다’ 본문 중에서


 사실 이 시가 수록된 이병률 시인의 시집 『찬란』에는 전반적으로 쓸쓸하고, 짙푸른 감성이 깊게 배어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시집을 이맘때가 되면 책꽂이에서 꺼내어 두고두고 펼쳐보곤 한다. 시인의 또 다른 시집인 『눈사람 여관』이 한겨울의 감정을 띈다면, 『찬란』은 초겨울의 날씨 그 자체이다.

 그 중에서도 ‘고양이가 울었다’는 두고두고 곱씹으며 의미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이다. 마음이 한번은 아릿했다가, 한번은 적막했다가, 또 한번은 형체를 알 수 없이 흘러내리기도 하는 것만 같다. 필자는 이 시 속의 고양이가 결국에는 정말로, 정말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양이 같은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2. 나태주- 추억


어디라 없이 문득
길 떠나고픈 마음이 있다

누구라 없이 울컥
만나고픈 얼굴이 있다

반드시 까닭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할 말이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추억’ 전문


 나태주 시인은 특유의 따뜻한 어조와 사랑에 관한 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대부분 유명한 작품들은 그 느낌이 잔잔하고 밝으며, 아름답다. ‘풀꽃’이나 ‘멀리서 빈다’ 같은 몇몇 작품들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 작품 ‘추억’은 시인 특유의 잔잔한 느낌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애상적인 분위기가 분명하다. 그냥 문득, 연거푸 추억들이 떠오르곤 할 때를 표현한 그 이유 없는 먹먹함이 마치 이 계절의 차가운 날씨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실로 그렇다. 지금은 추억을 새로 만들기 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추억을 그리워하기에 더 알맞은 계절이니까.



3. 박소란- 이 단단한


벽돌에게도 밤은 있고
또 그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아픈 기도의 문장을 읊조리기도 할 테지만
그것은 단지 벽돌의 일
당신과는 무관한 일

(중략)

나는 과연 벽돌이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따금 몸을 던진다
당신은 벽돌을 던진 적이 없다

-‘이 단단한’ 본문 중에서


 무엇인가를 ‘상실’하고서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살아간다는 것은 상실 그 자체의 순간보다 어쩌면 더욱 더 힘들고, 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 내면은 툭 건들면 바로 부서지기 쉬운 약한 상태일 테지만, 결국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기에 더욱 더 어색하기만 한 단단함으로 애써 스스로를 감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 상실과 이별의 순간을 ‘벽돌’을 소재로 말하고 있다.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졌지만 결코 ‘조금도 부서지지 않았다’고 애써 말해본다. 슬프다. 어쩌면 헤어짐과 상실의 시간 앞에서 기꺼이 무너져내려 울지 못하는 것은, 세상을 잃은 듯 소리 내어 우는 것 보다 더 처절하고 비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인스티즈, Pixabay)


[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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