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혼란의 미학, 또는 미끼?- ‘살인자의 기억법’ [영화]

글 입력 2017.09.2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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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는 소설, 특히 한국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제작이 한창이다. 작년 개봉한 <덕혜옹주>와 올해 상반기에 개봉한 <군함도>, 그리고 앞으로 줄줄이 개봉 예정인 <남한산성>, 그리고 <7년의 밤>까지. 게다가 최근 선풍적인 인기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소설 <82년생 김지영>, <우리의 소원은 전쟁>도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니, 가히 현재 한국 영화계는 ‘한국소설 천하’ 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편 이러한 한국소설 원작 영화들 가운데서 최근 가장 화제의 중심에 있는 작품을 꼽자면 단연 김영하 작가 원작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들 수 있다. 영화 개봉 이후, 원작 소설은 이른바 ‘스크린셀러’가 되어 다시금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의 대다수 소설 원작 영화들의 경우에는 영화의 제작과 개봉이 원작의 인기를 올리는 데 도움을 줬지만 <살인자의 기억법>의 경우, 이와는 조금 다르게 김영하 작가의 화제성 상승과 원작 소설이 본래 지니고 있던 인기가 영화 흥행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특히 눈여겨볼 만한 점이었다. 그리고 그 후 과연 소설의 어떤 점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매력적이었는지, 그리고 과연 영화 자체는 어떻게 표현 되었을 지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커지며 마침내 영화를 관람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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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기와 숨막히는 미장센

 우선 이 영화는 인물에 대한 설정이 대단히 인상 깊다. 알츠하이머와 살인자라는 소재는 두 가지를 서로 떼어놓고 본다면 각각 여러 영화에서 단골로 쓰이는 흔한 것들이지만, 이 두 가지를 합한 설정, 그러니까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라는 설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기의 시작과 동시에 인물의 한계 상황과 갈등을 강력하게 이끌어내는 충분한 극적 장치로써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배우의 연기에 의해 극을 완성시켜야 하는 영화 장르의 특성상 이 설정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이는 분명 표현해 내기 매우 어려운 설정임에 틀림없기도 하다. 또한 이 영화에서 반드시 표현해내야만 하는 설정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 병수 역을 맡은 배우 설경구의 연기는 매우 탁월했다. 물론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특히 설경구는 그가 아니었으면 누가 도대체 이 역할을 맡았을까 싶을 정도로 행동, 말투, 눈빛은 물론 세밀한 심리 묘사와 안면 근육의 떨림까지 완벽하게 병수를 표현해 냈다. 영화의 전개 상 미흡했던 부분을 배우의 연기가 어느 정도 대신 채워줘 아쉬움을 다소 덜 수 있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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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 빛나는 연기와 함께 시너지를 일으키며, 러닝타임 내내 이 영화를 주목하게 하는 멋진 미장센의 연속도 빼놓을 수 없는 이 영화의 장점이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색채나 미장센에 대한 욕구는 최대한 억눌렀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여러 미장센들은 분명 인상적이고, 훌륭하게 영화 전반의 분위기와 주인공 병수의 심리를 표현해 냈다. 빛보다는 어둠의 느낌이 강한 무채색의 사물들, 자욱한 안개, 기찻길과 대숲, 흰 눈… 러닝타임 내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끊임없는 미장센은 시종일관 눈부시게 주인공을 표현해내고, 영화의 시각적 완성도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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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그리고 녹음기

 영화의 오프닝과 마지막 장면은 모두 병수의 독백과 함께 시작된다. 소설 원작 특유의 느낌을 살려 관객들이 흡사 전지적 주인공 시점의 소설을 한 권 완독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대목이기도 한데, 이 내레이션과 더불어 영화를 열고 닫는 노래가 바로 박인수의 곡 ‘봄비’다. 이 곡은 곧 주인공 병수의 인생을 잘 함축하고 있다. ‘혼자’, ‘외로운’, ‘빗방울’, ‘눈물’ 등이 반복되는 노래 가사는 병수의 유년시절을 포함한 과거와 현재의 삶을 내레이션과 함께 관통하며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관객의 뇌리에 처연한 멜로디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다.

 녹음기도 이 영화의 전개 내내 매우 중요한 물건으로 작용한다. 영화 속 병수에게는 기억을 잊으며 삶까지 잃어버리고 있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기억을 붙잡고 복기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녹음기’인데, 특히 중요한 순간에서 병수의 음성메모를 통해 갈등이 진전되고, 새로운 국면을 맞음으로써 녹음기는 이 영화의 기승전결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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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혼란의 미학일까, 아니면 관객을 향해 던지는 미끼일까?

 <살인자의 기억법>은 끝을 향해 갈수록 하나의 결말로 맺어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엔딩컷이 찰나의 순간 보여지고 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들은 혼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 순간의 마지막 컷을 통해 러닝타임 중, 후반부터 점차 쌓아 올려진 혼란을 최고점에 다다르게 한 상태에서 그대로 영화가 끝나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끝난 후, 지난 해 <곡성>을 관람하고 난 후와 비슷하고도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이 영화의 진짜 결말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적 고민을 관람 후에도 오랫동안 하게 되었는데, 물론 이처럼 관객이 한참 동안 결말 해석에 대해 사유하도록 하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다면 이 영화는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관객의 시선에서 볼 때 <곡성>의 관람 후에 가졌던 그 혼란이 혼란스러움 그 자체보다는 작품을 더 흥미 있게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매력의 한 요소로 느껴졌던 반면, <살인자의 기억법>의 결말이 주는 혼란은 어딘가 답답하고 해소되지 않은 듯한, 말 그대로 혼란스러움 그 자체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 아쉬움이 남는다. 과연 감독이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했던 물음표는 그 자체로 열려있는 결말이자 그가 의도한 혼란의 미학이었을까, 아니면 관객들을 향해 던지는 미끼였을까? 결과적으로 이는 관객들의 해석과 호불호가 분분히 나뉠 듯한 부분임엔 틀림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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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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