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의 유통기한: 영화 '중경삼림'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6.26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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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영화를 직접 보기 전에는 홍콩을 배경으로 했다는 이유만으로 느와르 풍의 영화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는 어떤 하나의 장르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를 검색해보면 ‘멜로’ 나 ‘로맨스’라고 분류되어 있는데, 이 영화를 단순히 사랑 이야기로 분류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인 것 같다. 오히려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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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이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에서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인연을 포착하고 있는 영화라 언뜻 우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단순히 우연처럼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그려진다는 점에서 따뜻함 역시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대사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들어와서 쐐기처럼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들에게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다”라는 남자주인공의 독백처럼 말처럼 다른 상황에서 들었다면 단순하고 무미건조하게 들렸을 대사조차 영화 속에서 강렬하게 표현된다는 점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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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조림의 유통기한을 보면서 남자는 지나버린 사랑의 유통기한을 떠올리고 여자는 자신을 옭아매는 상황을 떠올린다. 같은 사물을 보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날짜가 지나버린 통조림을 꾸역꾸역 먹고 여자는 누군가를 죽인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일을 처리할 때의 냉정하고 냉철한 모습만 봤을 때는 모든 면에서 빈틈없이 완벽해야 할 것 같은 여자에게도 실수를 하거나 풀어진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는 묘사가 또한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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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약 밀매를 위해서 고용한 사람들이 정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모습이나, 남자 주인공과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그대로 뻗어 버리거나, 협박을 위해서 납치한 여자아이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맛있는 것을 사주는 등의 묘사가 외적인 모습으로 부터 상상하고 있던 그녀에 대한 편견을 하나씩 깨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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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 주인공들은 특별하지만 또 평범하기도 하고, 평범한 듯 보이지만 하나하나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가 보편적인 도시인들의 짧은 인연에 대해서 그리고 있지만 묘하게도 주인공들의 인연이 진부하지 않은 것이 놀라웠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온전히 혼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외롭다.

 사랑도, 우정도, 그 어떤 관계도 마치 보이지 않는 유통기한이 지나가 버린 것처럼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고는 한다. 도시의 사람들 자체도 그렇다. 모두들 자신의 유통기한이 언제일지 몰라 초조해 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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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스치는 관계의 유통기한이 지났더라도 그 기억에는 유통기한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관계의 깊고 얕음을 시간에 비례한다고들 하지만, 이 영화는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낯설기 때문에 더 강렬하고, 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솔직해질 수 있는 관계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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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뿐만 아니라 스쳐갈 것을 알기에 솔직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유통기한이 지날 것이고 내 곁을 떠날 것이기에 우리 곁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들이 결국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에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하게 남아있는 기억 그 자체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최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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