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의 '아몬드', 안녕한가요? [문학]

손원평의 '아몬드'를 읽고
글 입력 2017.06.24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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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jpg


< 아몬드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아몬드 >라는 독특한 제목, 책표지의 무심한 얼굴의 소년이 눈길을 끌었다. 평온한건지 무심한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고 결국 책을 샀다.



나에겐 아몬드가 있다.
당신에게도 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거나
가장 저주하는 누군가도 그것을 가졌다.
아무도 그것을 느낄 수는 없다.
그거 그것이 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프롤로그)



책에서 '아몬드'란 뇌의 편도체를 비유하는 말이다. <아몬드>는 편도체가 남들만큼 발달하지 않아 스스로의 감정을 느끼지도,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주인공 '선윤재'와 너무나 감정에 예민해서 상처를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익숙한 아이 '곤'의 이야기이다. 감정을 못 느껴서 탈인 아이와 너무 잘 느껴서 괴로운 아이, 절대 상처받지 '못하는' 아이와 상처투성이인 아이, 두 소년은 완전히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마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171-172쪽)



흔히 공감하지 못하고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이코패스같이 폭력적인 경우를 떠올리지만 윤재는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따지자면 소년원까지 갔다온 곤이 더 폭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상반된 모습의 둘을 만든 것은 결국 사랑이다. 한 명은 넘치게 받았고, 한 명은 늘 부족하기만 했던. 두 사람 중 아무 조건없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윤재 쪽이다.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는 사람을 온 마음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누구보다도 사랑이 필요했던 곤은 어릴 때 놀이공원에서 엄마의 손을 놓친 뒤로 보호시설과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그 결과 윤재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할지라도 타인을 생각하고 배려하려 노력하는 아이가 되었고 곤은 자신의 결핍을 숨기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에 폭력을 행사하는, 학교에서 흔히 말하는 문제아가 되었다. 이런 결과를 놓고 보면 과연 공감하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인가 의문이 든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245쪽)



물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윤재가 처음에는 낯설었다. 기쁨도, 슬픔도,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윤재와 공감할 수 있다고 여기는 우리가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편도체에 이상이 없음에도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만 봐도 그렇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린 윤재를 '괴물'이라 불렀던 사람들, 윤재가 당한 끔찍한 일을 새학기 첫날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격려의 박수'를 보내자고 했던 담임, 눈앞에서 엄마와 할머니가 죽는 걸 보는 기분이 어땠냐고 묻는 같은반 친구, 곤이 돈을 훔쳤을 거라 단정지었던 학생들, 자신이 원하던 모습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곤의 존재를 부정하는 곤의 아버지. 더 거슬러 올라가 윤재의 할머니와 엄마가 묻지마범죄의 표적이 되던 순간 그걸 지켜보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감정도 없고 공감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나? 아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아몬드'를 가진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나 또한 평균의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내뱉는 '공감한다'는 말은 그저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마는, 무언가를 바꾸기에는 턱없이 가볍기만 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괴물이라 부를 자격이 우리에게는 있나?


나를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소설은 정말 괴물이 누구인지 물어본다. 오히려 공감할 줄 알고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고 상처를 주는 쪽이 더 괴물에 가깝지 않은가. 행동 없는 공감, 타인을 짓밟으며 느끼는 감정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無)의 상태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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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가 사람들에게 괴물이라 불렸듯이 곤도 과거 자신이 저지른 비행들로 구제불능 취급을 받는다. 스스로 자신의 공감능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편견으로 곤을 단정짓고 평가하며 틀 안에 가둬 버린다. 오히려 곤을 구원하는 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윤재였다. 윤재는 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순수하고 선한 영혼을 발견하여 그를 편견없이 친구로 받아들인다. 이런 윤재의 행동은 물론 그가 공포심을 포함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윤재가 곤을 편견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더 큰 이유는 그가 비록 머리 속 '아몬드'는 고장났을지라도 타인을 편견없이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엄마와 할머니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주는 편견없는 사랑은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가 그에게 주었던 그 깊은 사랑은 마침내 싹을 틔우고 큰 나무가 되어 곤과 윤재 자신을 성장시킨다.



그렇지만 말이야,
사람의 머리란 생각보다 묘한 놈이거든.
그리고 난 여전히,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쩌면 넌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란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박사가 웃었다.
자란다는 건, 변한다는 뜻인가요.

아마도 그렇겠지.
나쁜 망향으로든 좋은 방향으로든.
(252쪽)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윤재가 마침내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는 소설의 결말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답은 없다. 모든 감정은 한가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니까. 셀 수 없이 많은 감정들과 함께 살아갈 윤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공감할 수 있느냐 없느냐, 감정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 머릿속 '아몬드'가 정상이냐 아니냐가 더 나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는 걸 소설을 통해 쭉 확인했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작은 '아몬드'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을 믿고 편견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이다. 윤재는 그런 가슴을 지닌 사람이므로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으며 기분 좋은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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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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