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 [문화 전반]

글 입력 2017.06.09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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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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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Never Let Me Go』는 영화 <아일랜드(2005)>와 무척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가상의 영국으로, 복제인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 상태이다. 주인공인 Kathy H를 비롯한 복제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20살이 넘어 성인이 되면 자신들의 원본, 즉 오리지널인 ‘진짜’인간에게 장기를 ‘기증’하게 될 것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다. 그들의 삶은 자신들의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어릴 때부터 계속 반복적으로 암시를 받다가 어른이 되면 3번에서 4번 정도의 ‘기증’을 한 뒤 죽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과연 소설 속 복제인간들의 삶이 ‘기증’ 이외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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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영화 <밀양> 역시 삶의 이유를 찾는 신애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 행복한 가정을 위한 꿈이 박살나고, 서울에서 온 부유한 피아니스트이자 슬픈 사연을 가진 여자라는 이미지마저 깨어져버리고, 자신의 아이마저 잃고도 용서할 힘마저 가지지 못하는 여자가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이 두 작품 속에서 삶은 공동체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공동체는 이들에게 하나의 패턴을 가진 삶을 요구한다. 즉, 스스로의 원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원래의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려야, 원래 자신이 어떤 모습이고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려야만 가능해진다.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잊을 때에야 비로소 공동체로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작품의 주인공인 신애와 Kathy는 둘 다 공동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Kathy의 경우에는 공동체를 벗어나고자 하는 인물이고, 신애의 경우에는 공동체에 들어가고자 하는 인물로 상반되지만 말이다. 이렇게 공동체와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인물을 비교 분석하면서, 역으로 공동체가 어떻게 구성되고 또 유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더 나아가서, 그렇다면 모여 사는 사회로 이루어진 인간 세상에서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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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Never Let Me Go의 주인공 Kathy는 8살 때 이런 경험을 직접적으로 하게 되는데, Kathy가 있던 학교인 헤일샴에서는 학생들이 접하는 세상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가지도록 간접적인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즉, 헤일샴 외부의 사회에 대한 정보를 아예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치 그 모든 것을 교육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Kathy는 Lucy 선생님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들이 “not enough taught”인 상태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는 헤일셤 학생들이 그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정보는 듣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Lucy 선생님은 “It'll be explained” 라고도 말한다. 이 말 역시, 헤일셤의 학생들이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그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학생들이 영국 사회라는 공동체에 실제로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타자’의 입장, 즉 수동적인 입장에 있음을 암시한다.

 헤일셤 이라는 곳의 교묘하게 조작된 교육 방식과 운영 체제는 Kathy를 포함한 그곳의 아이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이 진짜로 어떤 의미인지 깨달을 나이가 되기 전에 이미 그들을 정해진 틀 안에 가두어 버린다. 헤일셤의 학생들은 Lucy 선생님이 이야기 하는 사실, “None of you will go to America, none of will be film stars.”을 “been told but not told”하고 있는 상태이다. 헤일셤을 떠나면 자신들은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도구가 되어 장기기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알고 있는’ 상태는 그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결국 클론들에게 진실이 설명되는 순간은 그들이 기증을 마치고 죽기 직전이라는 것이다. Kathy는 자신이 과거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세계에 속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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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반대로, <밀양>의 신애는 계속해서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차례로 부서지고 만다. 그녀가 끊임없이 이런 이미지들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이유는, 물론 그녀 자신이 그렇게 보이고 싶었던 것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어떤 공동체에 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신애가 목표로 삼은 공동체는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들이 모여 있던 사교 모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많은 돈을 가진 여자인 척, 교양 있고 남편에게 사랑받던 여자인 척 한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는 아들을 잃는다. 아들을 잃고 나서 그녀는 교회라는 공동체로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교회 모임을 성실하게 나가고, 엄청나게 독실한 신자가 된 것처럼 행동한다.

 심지어는 보통 사람은 죽어도 용서하지 못할 아들의 살인범을 용서하겠다는 선언을 하기 까지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에게 그 자리를 빼앗겨 버리고 만다. 어디에도 그녀가 서 있을 자리가 없어지자 그녀는 결국 미쳐버리고 만다.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그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혼자 남겨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역설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유지 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우리가 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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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는 결코 동등한 인간들의 집단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차이, 즉 삶의 차이 그리고 경험의 차이가 우리를 불평등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교육을 받고 있다고 믿으며, 같은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으며 ‘우리’가 참 많이 ‘닮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서로에게서 각자가 기대하던 모습을 보고, 또한 동시에 남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를 상정하고 그 모습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공동체는 구성될 수 있으며 또한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결국 그런 공동체가 상정하는 공통점이 결국 허울뿐인 것이며, 신애가 그러했듯 너무나 쉽게 무너져버린다는 것에서 공동체는 ‘우리가 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삶과 연결된다. 공동체가 요구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우리가 공동체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하는 일들은 가끔씩 우리를 힘들게 한다.

 Kathy와 신애의 모습은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에 겪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삶을 부분마다 잘라 나눠본다면 그녀들과 같은 마음인 순간순간들이 존재할 것이다. 내가 살아야만 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이 나를 미치게 만드는 순간이.

  그렇다면 이런 삶, 경험할 때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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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ver Let Me Go』의 결말부에서 주인공인 Kathy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인 Tommy가 기증을 해야 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헤일셤에 돌던 소문, 즉 복제인간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 복제인간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걸 증명한다면 ‘기증’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소문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죽을 것을 체감하면서, Tommy는 급류에 대한 비유를 이야기한다. 그는 엄청나게 빠른 급류에서, 서로를 붙잡고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려 했던 두 사람이, 결국은 휩쓸려 떠내려가고 마는 이미지를 표현하는데, 이는 그들의 삶과 일맥상통한다.

 이때, Tommy의 비유에서 당연하게 떠오르는 의문점은 떠내려 갈 것이라면 두 사람이 서로를 붙잡고 있던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더 이상 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지 않기로 해버린 신애의 경우 모두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결코 밀양이라는 도시를 떠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 공동체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거기에 있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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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혼자인 것도 아니다. 신애의 곁에는 종찬이 있다. 그녀가 그토록 들어가고자 했던 공동체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어떤 가면도 쓸 수 없는 상태로까지 피폐해졌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곁에는 누군가가 있다.

  급류라는 것 자체의 성질을 생각해 보면,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을 닮아있으며, 또한 벽처럼 단단히 막혀있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거친 물살을 헤치고 올라갈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급류는 또한 신애가 들어가고자 했던 공동체를 생각나게 한다. 어딘가에 소속될 수 있으리라는 상상 속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한다.

 헤일셤의 학생들은 그들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물결을 따라가면서 다른 복제인간들보다 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많은 특권을 누리면서 소위 ‘행복한’ 복제인간으로 살 수 있었다. 복제인간이 정해진 길을 벗어나는 것을 불가능하게끔 교육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스템 안에서 그런 방식은 최선이 아닐지 몰라도 최악이 아닐 수는 있었다.

 하지만 Kathy와 Tommy는 급류의 흐름을 거슬러 스스로 그 자신들을 파괴할 진실, 즉 그들이 믿었던 것은 소문에 지나지 않고 결국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그들은 이상하리만큼 순순히 자신들의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그건 누군가는 끔찍한 운명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자유가 있다는 것만으로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거센 조류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해도 그러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헤일셤의 그 모든 교육과 더 나아가서 그들의 공동체를 통한 것보다 훨씬 더 완전한 방법으로 자신들이 처한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정 반대의 경우이지만 신애 역시, 결국에는 공동체가 간과하고 있는 우연에 의해서 자신이 가지려 했던 허상들에서 놓여난다. 그녀가 불행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Kathy와 신애는 모두 스스로가 정말 원했지만 결코 가지지 못했던 것을, 결국 가지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는 것이 그들을 공동체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들며, 또한 가짜 모습이 아닌 진짜 나를 가진 채 살아갈 수 있게끔 한다. 그 진정한 모습을 인정해 주는 이를 만나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더한 ‘공동체’가 어디 있겠으며, 어느 누가 그들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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