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떤 취미발레생의 넋두리_2 [예술철학]

현실은 직시했지만 열정은 꺼지지 않는다
글 입력 2017.04.25 18:4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wa3fRHI1zaXfeQlULZl2KYCde9E.jpg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한동안은 공부에 치여 발레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 시기에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끝없이 앞만 보고 (막상 뚜렷한 목적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만 해야 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특이하게도 무용수업이 있었다. 전교생 모두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주일에 한 번 무용수업을 필수로 들어야 했는데, 발레와 한국무용을 짧게나마 배우는 식이었다.

오랫동안 쉬어서 예전 같은 실력이 나오진 않았지만, 무용을 접해보지 않은 대부분의 학생들에 비해 나는 비교적 잘하는 편이었다. 무용 선생님은 혹시 무용에 관심이 있으면 전공도 고려해보라고 하시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한동안 마음 한 구석에 파묻혀서 오랫동안 존재감이 없었던 발레에 다시 열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서,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무용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그 기대는 무참히 깨졌고,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내가 진지하게 무용 쪽 진로를 고민하는 걸 알게 된 엄마는 나와 함께 집 근처 발레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갔다. 그 학원은 내가 어렸을 때 문화센터 다음으로 잠깐 다녔던 학원이기도 했는데, 그 당시의 원장 선생님이 아직까지 계셨다. 그 분은 내 체형을 살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뼈대가 너무 굵어. 발레는 뼈대가 가늘고 마른 사람이 유리하지. 특히 이렇게 늦은 나이에 시작할 경우 선천적인 신체조건을 타고 나지 않으면 가망이 없어. 또 발레는 몸의 안쪽 근육을 사용해야 하는데 지금 허벅지 바깥근육이 너무 발달되어 있어. 이걸 없애기는 힘들어.

그리고 지금부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미 3,4살 때부터 시작해서 근육이 섬세하게 다져진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어. 몸무게도 많이 나가는 편이고.

또 이렇게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이미 2차 성징까지 다 끝난 상태라 몸에 굴곡이 생겨서 회전할 때 방해가 돼. 성적도 그 정도면 좋은 편인데 왜 이제 와서 이 힘든 걸 굳이 하려고 해?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다른 진로를 찾는 게 나을 텐데.”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대충 정리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그 분의 말씀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분이 내가 발레에 불리한 이유를 하나씩 말씀해 주실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분을 원망하거나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17살에 발레를 시작해서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 아주 특별한 신체조건 (날씬한 체형, 바깥쪽으로 열린 골반, 얇은 뼈대, 긴 목선, 작은 얼굴 등)을 타고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하다. 당시 나는 체중이 급격하게 증가해서 누가 봐도 전혀 발레에 적합한 몸매가 아니었다. 살이야 빼면 된다고 쳐도, 그 외에 다른 유리한 조건에는 해당사항이 거의 없었다.

결국 참으려고 했던 눈물이 그 자리에서 터져 나왔다. 마지막 희망의 불씨마저 무참히 꺼져 버렸다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분께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금전적인 이득만 생각하는 분이었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꼬드겨 나를 전공생으로 받으려고 했겠지만 그러지 않고 굉장히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허황된 꿈(?)을 접을 수 있었고, 대신에 앞으로 발레를 내 평생취미로 삼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대학에 입학했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다시 발레를 배우러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학교생활이 바빠 중간에 쉰 적도 많았지만, 지금까지도 꾸준히 배우고 있다.

몇 년 전부터인가 발레핏 등 발레가 다이어트의 한 방법이 되면서, 수많은 성인들이 발레학원을 찾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다녔던 학원도 성인을 대상으로 취미발레를 가르치는 학원이었다.

처음에 학원에 찾았을 때, 나처럼 다소 늦은 나이(?)에 발레를 배우는 성인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다이어트 목적으로 학원을 찾은 분들도 있었지만, 나처럼 발레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갖고 찾아오시는 분들도 굉장히 많았다. 그런 분들은 뒷모습만 봐도 분위기가 달랐는데, 동작 하나하나에 심열을 기울여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려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분들 중에서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있었고, 남자분들도 있었다. 그런 분들을 보고 있으면, 발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그 분들에게도 있는 것 같아 일종의 유대감 같은 게 느껴진다.


Swan_Lake_Lunkina.jpg
 

사람들은 보통 ‘발레’ 하면, ‘날씬한 몸’, 그리고 ‘유연성’ 정도를 떠올리는 것 같다. 나도 발레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기 전에는 그랬다. 그냥 날씬하고 유연하면 쉽게 할 수 있는 춤의 한 종류라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발레를 점점 더 깊이 알아갈수록, 더 오래 배울수록 뼈저리게 느끼는 점은, 발레는 상상 그 이상으로 근력과 체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dd.jpg
 
Misty-Copeland-12-yqzelj.jpg

misty copeland.png
 
 
위 사진들은 미국의 주요 발레단 중 하나인 ABT (American Ballet Theater)의 역사상 첫 흑인 수석무용수인 ‘미스티 코플랜드’ (Misty Copeland)인데, 발레에 얼마나 많은 근육과 힘이 들어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스티 코플랜드의 경우 다른 무용수들에 비해 근육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발레리나들이 결코 훨씬 근육량이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발레리나들 모두 이런 근육을 갖고 있지만 보통 길고 가늘며, 주로 안쪽에 위치해 있고, 또 워낙 말라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뿐이다.


arabesque.jpg
 

지방량은 최소화하면서 발끝 하나로 온 몸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키우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전공하는 사람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발레에 적합한 몸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닌 듯 싶다. 나처럼 취미로 배우는 사람들이 발레리나들처럼 여리여리한 몸매를 갖기는 어렵지만, 몸 구석구석에 근육이 붙으면서 탄력이 생기는 걸 느낄 수 있다.





tumblr_mv8ay68nh61r5zpk1o1_500.jpg


그만큼 발레는 나에게 있어 결코 정복하기 쉬운 대상이 아니다. 앞으로 평생 배운다고 해도 결코 완벽한 실력을 갖출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동기부여가 되고, 열정이 꺼지지 않는다.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움직임이 발레라고 생각하기에, 또 그 움직임을 동경하기에 나는 지금까지 발레를 사랑해 왔고 또 앞으로도 평생 배울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학원에서 1년에 한 번씩 하는 공연에 솔로로 참가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지금은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시기이니 마냥 발레에만 빠져 지낼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직장을 구해도 시간에 치여 취미생활을 누릴 여유가 거의 없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물론 직업과 취미를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앞으로도 그 열정이 변함없을 거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 몸으로 가장 아름다운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그 날까지, 앞으로도 발레를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할 것이다.


[박한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