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라, 나라를 가다. [여행]

여유와 사색, 사슴이 함께하는 도다이사 여행기
글 입력 2016.11.08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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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나라를 가다.
-여유와 사색, 사슴이 함께하는 도다이사 여행기-


오사카비행기 로고 copy.jpg


  미처 가을이 오지 못한 늦여름,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의 일본행은 정말 갑작스럽게 결정됐다. 올해 2월, 겨울 방학이 끝나갈 때쯤, 개강을 앞두고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였을 때 누군가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고, 그 말 한 마디에 부랴부랴 숙소를 예약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1학기를 시작하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출국할 때가 되서야  생각이 난 우리는 또 다시 부랴부랴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5박 6일의 긴 여행 동안 간사이 지방을 돌아보는 계획에서 단연 기대가 됐던 지역은 '나라 현'이었다.

    나라는 나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일본 나라시대의 수도로서 많은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동양 최대의 목조 건물인 도다이사의 본당, 불교 조각의 컬렉션으로 유명한 나라 현립 박물관, 고고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옛 거리 나라마치, 역사교과서에 꼭 등장하는 고구려인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가 있다는 호류사, 이외에 고후쿠지 및 다른 불교 유적들, 보너스로 국립공원 내부에서 자유롭게 뛰어 노는 사슴들까지. 나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볼 것이 많은 조용하지만 알찬 지역이다. 


사슴 copy.jpg
 

  오사카의 숙소에서 미처 다 깨지 못한 잠을 덕지덕지 붙인 채로, 나라 행 기차에 올랐다. 소위 말하는 '꿀잠'을 자고 나니 어느새 나라 역에 도착해 있었다. 나라 현은 참 착하게도 웬만한 관광지는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아기자기 모여 있다. 나라 역에서 빠져나와 5분쯤 걸었을까, 저 멀리서 사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리고 귀여운 사슴들을 보면서 흐뭇해하다가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져있기를 얼마나 됐을까,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툭툭 찌르기 시작했다. 놀라서 퍼뜩 뒤를 돌아본 내 등 뒤에는 곧게 뻗은 뿔을 자랑한 채 불량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큰 사슴이 있었다. 멍하니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다시 한 번 투-욱, 투-욱. 그 큰 뿔로 나를 툭툭 찌르기 시작했다. "먹을 것을 내 놓아라."라는 뜻이다. 약간은 황당한 기분으로 주변의 상인 분께 먹이를 사서 건네받는 순간, 주변의 모든 사슴들이 내게 돌진했다.  

  먹이가 사라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분. 순식간에 채어가는 사슴들을 보면서 역시 '다 큰 것들은 닳고 닳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뿔로 먹을 것을 내 놓으라 으름장을 놓고, 먹이를 든 사람들을 심각할 정도로 뒤쫓으며 전투적으로 먹이를 먹고, 가끔씩은 뿔로 사람들이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찢거나 종이를 씹어 먹는다. 그리고 먹이를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냉정히 뒤돌아서는 도도함까지. 나라공원 안의 사슴들은 어린 개체들을 빼고선 굉장히 자기 밥벌이를 잘 하는 듯 했다. 특히 먹이를 주지 않으면서 사진만 찍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리 잘 아는 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폼이 공원의 터줏대감과 같은 포스였다. 


도다이사 copy.jpg
 

  한창 사슴에 빠져 있다가 거의 쫓기듯이 먹을 것을 요구하는 사슴들을 피해 발길을 재촉했다. 고후쿠지를 지나고 나라 현립 박물관을 둘러보고 발길이 멎은 곳은 꼭 내 눈으로 보고 싶었던 도다이사 대불전이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하는 '역사덕후'(이하 역덕)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도 동아시아사, 세계사, 한국사를 섭렵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한국사 자격증을 공부하고 박물관에서 인턴을 하면서 사학과 친구들과 어울렸다. 이런 역덕인 나에게 도다이사는 외국에서 처음 만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마침 날씨도 쨍하고 맑고 푸르러서 눈도, 마음도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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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날씨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인지, 이날따라 사진도,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도 눈이 시리도록 예뻤다. 특히 정원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관리하는 일본의 특성 상 도다이사가 품고 있는 푸른 정취는 오사카에서 관광객에게 시달리느라 지친 마음을 여유롭게 만들기 충분했다. 대불전 안쪽으로 들어가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는 부처를 만나고 향을 피우고 느긋하게 한 바퀴를 돌고 나왔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절에만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해서 꽤 오래 대불전의 계단에서 앉아 햇빛을 즐기다가 도다이사를 찾아온 메인 목적을 달성하러 발길을 돌렸다.

이월당로고 copy.jpg


   많은 한국 사람들이 나라에 오면 사슴들을 보고, 대불전을 보고 발길을 돌린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도다이사의 매력은 대불전이 아닌 다른 소소한 부건물들이었다. 대불전을 뒤로하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면 종루와 마치 일본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작은 가게들이 있다. 신사가 많은 나라인 만큼 절에도 작은 탑들이 곳곳에 있고 한창 푸른 여름 햇살에  꽃분홍색 배롱나무 꽃이 피어있는 모습은 카메라로 담지 못할 만큼 예쁜 대비였다.  천천히 절을 구경하면서 도착한 곳은 일본의 국보인 이월당, 일본어 발음으로는 니가쓰도였다. 니가쓰도에 올라가면 도다이사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아래에서도, 위에서도 니가쓰도를 둘러싼 풍경은 예쁘다는 감탄사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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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당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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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당에서 내려다 본 전경 


이월당뷰 로고 copy.jpg
이월당 난간에서 보이는 풍경 


  흔히들 사양(斜陽)이라고 하는 저녁 시간의 햇빛이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4시에서 5시로 넘어가는 언저리, 아직 하늘은 푸르지만 슬슬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는 그 시간대에 내려다 본 도다이사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월당은 대불전보다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람도 더 적었고, 분위기도 평화로웠다. 가만히 이월당에 서서 절 건물들과 나무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대학생이 언뜻 아재감성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도시의 북적북적함을 떠나서 고요한 곳에 오니 부풀어 오르듯 기분이 고조되었다. 아마 승려들이 욕심을 버릴 수 있는 이유도 이렇게 자연이 주는 포근함 때문일 것이다. 물욕에 찌들고 속세에 닳고 닳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문명의 노예인 나는 그나마 이렇게 가끔씩 조용한 일탈을 하면서 복잡한 마음을 다스린다. 도다이사는, 특히 이월당은 멀리 있는 게 아쉬울 정도로 호젓하고 자주 가고 싶은 절이었다. 조용하게 마음을 다스리고 싶다면, 오사카에 방문하는 김에 한 시간을 더 들여 나라 현에 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도다이사 대불전만 둘러보고 발길을 돌릴 것이 아니라, 꼭 위쪽으로 올라가보라고도 말하고 싶다. 이월당 난간 위에 올라서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이 풍요로워 질 것이다. 

  나라 현은 도다이사 말고도 호류사, 나라마치 등 호젓함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많다. 그렇지만 그 호젓함을 즐기겠다고 마치 관광 상품 투어를 다니는 방식은 절대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나라 현은 여유가 넘치는 곳이다. 그 여유를 즐기는 방법은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호류사를 가든, 나라마치를 가든, 도다이사를 가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충분히 즐기는 것이 나라 현 만의 호젓함을 즐기는 똑똑한 방법이다. 절대로 시간에 쫓기면서 여유를 버려선 안 된다. 오랜 시간을 담고 있는 문화유산들과 자연은 오래 볼수록, 그리고 천천히 볼수록 아름다운 법이니까 말이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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