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빛나는 마지막 문장을 품은 문학과 함께 한 주의 마무리를 [문학]

글 입력 2015.03.2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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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학을 읽을 때는 책장이 마지막으로 넘어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 넘겨진 페이지 수와 함께 마음속에 쌓인 거대한 서사가 어떻게 마무리될까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과 이야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공존한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을 때, 그곳에 남아 있는 좋은 문장은 묵직한 감동을 전해준다. 읽고 난 뒤 여운에 젖어 페이지의 여백을 만지작거리게 되는 문학의 마지막 문장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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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강렬한 첫 문장도 유명하지만, 마지막 문장 역시 감탄스럽다. 기록의 예술로써 롤리타와의 불멸의 기억을 지키고자 하는 험버트의 문장은 너무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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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날개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날개>'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박제되어 억압된 자아는 마지막 문장에서 날아오르기를 희망한다. 어렸을 때 <중학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단편소설>과 같은 단편모음집에서 처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상이 어떤 사람인지, 이 소설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그 때,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하는 이 마지막 문장만은 기억에 남아서 입으로 수없이 되뇌어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상-봉별기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 질러 버려라 운운.

 

<봉별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상의 여인 금홍이 부르는 창가이다. 인디밴드 가을방학의 노래 <속아도 꿈결> 가사에서 먼저 접한 문장이라서 그런지 읽을 때마다 노래를 부르는 금홍의 모습이 쓸쓸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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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그녀가 보고 싶다. 하지만 이 집 아이들이 조르니 당분간은 함께 있고 싶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라몽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도 흔하게 쓰여 그 가치에 대해 무심해졌던 나에게 어린 아이가 사랑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을 때는 너무도 부끄러웠다. 인간은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 확인하게 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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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두근두근 내인생

 

아버지, 내가 아버지를 낳아드릴게요. 어머니, 내가 어머니를 배어드릴게요. 나 때문에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드릴게요. 아버지, 내가. 어머니, 내가. 그런 뒤 물뱀처럼 허리를 꺾어 어디론가 재빠르게 달아난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어디로 갈까. 그런 것은 모르겠다. 다만 조금 전 내가 던진 한마디, 어디예요? 그 한마디가 어쩌면 내가 지상에 남기고 가는 마지막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것. 아빠. ? 어디예요. ? 조금 전…… 어디에서 웃었어요?

 

섬세한 문장을 쓰는 김애란의 대표작 <두근두근 내인생>은 문장 하나 하나가 따뜻하고 소중해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조로증에 걸린 소년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먹먹한 감동과 함께 두근두근한 삶에 대한 사랑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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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데이비드 샐린저-호밀밭의 파수꾼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좋은 성장 소설은 성인이 된 후에 읽어도 풍부한 느낌을 준다. 아니, 사실은 성장기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순간이 성장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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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무진기행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한국 현대소설의 쓸쓸한 분위기를 사랑하는데, <무진기행>은 그러한 분위기가 문장 한줄 한 줄에 걸쳐 안개처럼 마음에 전해지는 소설이다. 안개로 둘러싸여 뿌연 무진에서 벗어나와 주인공이 부끄러움을 느낄 때, 무진에 남은 것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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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플레이 볼.

조성훈이 소리쳤다.

재구성된 지구의 맑고 푸른 하늘을 지나

공이 날아왔다.

만삭의 아내가 손을 흔들었다.

저 두근거림 앞에서

이제 나는

저 공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

 

플레이 볼이다.

 

권태로운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숨이 막히는 세상살이에서 조금 열심히 살기 시작할 때 삼미슈퍼스타즈의 진짜 야구가 시작된다. 재구성된 지구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 짧게 끊어진 문장에서 느껴지는 두근거림. , 플레이 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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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루이-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아무리 생각해도 피안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아마도 이 세계, 인간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끝없이 전해지는 전설뿐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는 중국의 전설이자 송대의 희곡인 <백사전>을 다시 쓴 작품이다. 인간과 뱀의 정체성을 함께 지닌 백사로 대표되는 인간 사회의 박해받는 자들의 고통이 쓸쓸하게 전해진다. 전설이 지닌 오랜 세월의 냄새가 현대의 문장을 통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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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살인자의 기억법

 

미지근한 물 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길지 않고 문장이 쉽게 읽혀서 빨리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빠르게 책장을 넘겨 마지막 문장을 만났을 때, 독자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충격에 빠진 채로 다시 첫 장을 펴서 정독하게 만드는 마지막 문장을 잊을 수 없다.



여운이 남는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좌석을 떠날 수 없다. 좋은 문학도 마찬가지여서 멋진 마무리를 읽은 후에는 차마 책장을 덮기가 아쉬울 때가 많다. 빛나는 마지막 문장을 품은 문학작품과 함께 한 주의 마무리를 하는 것은 어떨까. 그 감동이 분명 마음에 남아 내일부터는 더욱 풍성한 한 주가 될 것이다


[유윤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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