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뚱뚱한 몸매를 아름답다며 추앙하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대한민국 국민 첫사랑도, 국민 여동생도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이 있을 뿐 비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리타니에서는 우리나라와 정반대인 기준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비만을 부의 상징으로 여겼고, 어린 딸에게 기름진 양고기와 버터를 섞은 전통 음식을 먹였다. 배가 불러서 거부하면 체벌까지 했다. (참고로 현재는 인권과 건강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 비만 문화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있다.)
강제로 살을 찌우는 르블루(leblouh)의 옳고 그름을 떠나, 뚱뚱한 몸을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긴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저런 몸을 아름답다고 말하지?'와 같은 자문화중심주의적 태도라기보다는, 정말 순수한 충격이었다. 날렵한 신체를 좋아하는 것은 타고난 나의 취향이며, 많은 사람들 같은 기준을 가진다는 사실은 곧 마른 몸이 '절대적 美'에 가깝다는 증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기준이 보란 듯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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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미적 기준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제는 절대적 아름다움이란 허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고정관념이 남아 있기는 하다. '미의 기준은 절대적인가?' 하던 질문에 부사만 하나 추가된 셈이다.
미의 기준은 과연 얼마나 절대적인가?
모두가 테니스 스커트를 입던 2015년을 지나, 저마다의 개성이 돋보이는 2026년으로 왔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홍대룩, 빈티지룩 등 스타일이 전부 다르다. 그럼에도 아직 당연시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체형이나 비율, 피부색에는 비교적 정답이 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보며 위와 같은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오랜 질문은, 4월의 어느 날 「페르난도 보테로展」에서 완벽히 풀리게 된다.
남미의 피카소. 볼륨의 화가. 보테리즘(Boterismo)의 창시자.
모두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바로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를 설명하는 표현들이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그는 남미 특유의 생동감과 낙천성을 화풍에 그대로 담아낸다. 회화와 조각, 드로잉을 넘나들며 종교와 신화, 투우와 서커스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룬다. 작품들은 하나같이 유머러스하고 따뜻하지만 그 이면에는 권력, 폭력, 인간 존엄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숨어 있다.
다양한 장점과 개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다. 하지만 페르난도 보테로의 가장 큰 특징은 다름 아닌 '볼륨감'에 있다. 그는 인물과 사물을 팽창시켜서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도 '과하다'거나 '부담스럽다'는 감상은 잘 들지 않는데, 작가가 팽창 자체를 하나의 미학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은 균형과 색채, 공간을 치밀하게 탐구하여 완성한 결과물이다.
아직 할 말이 많지만 이쯤에서 멈추겠다. 이와 같은 이론적인 설명이 와닿지 않을 수 있음을 이해한다.
그래서 예술의전당에서 작품들을 직접 촬영해 왔다. 아래로 이어질 사진들을 보면서 그가 왜 '볼륨의 화가'라 불리는지 자연스럽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명화의 재해석, 색다른 아르놀피니 부부
ⓒ 페르난도 보테로,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얀 반 에이크를 따라》, 2006, 캔버스에 유채, 205 x 165 cm, Fernando Botero Foundation
미술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섹션. 변주 Versions」에서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다. 보테로가 고전 거장들과 나눈 대화들을 찬찬히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엄숙하고 권위 있던 작품들이 보테로의 손에서 인간적이고 유머러스하게 다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을 두 눈에 담으며 자랐다. 특히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회화를 깊이 탐구했고, 열아홉 살에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모사 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섹션은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모사의 기술이 작가의 고유한 개성과 합쳐져 폭발하듯 드러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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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얀 반 에이크를 따라》는 북유럽 르네상스의 걸작으로 유명한 《The Arnolfini Portrait》를 재해석한 것이다. 원작에서 날렵하고 긴장감 있던 인물들이 둥글고 풍만한 형태로 팽창하였다. 여기서 특히나 흥미로운 점은, 가구나 소품, 동물까지도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발치에 원작보다 한층 풍만해진 개 한 마리가 자리하고 있다. 더 이상 귀엽고 날렵한 테리어는 아니지만,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
발레의 오랜 규칙을 부수다, 바 위의 발레리나
발레는 신체에 대한 기준이 엄격한 예술이다. 오랫동안 이상적인 비율과 가볍고 날렵한 몸을 요구해 왔다. 그러한 신체가 고난도의 발레 테크닉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며, 시각적으로도 아름답다고 평가받는다.
ⓒ 페르난도 보테로, 《바 위의 발레리나》, 2001, 캔버스에 유채, 164 x 116 cm, Fernando Botero Foundation
하지만 보테로는 풍만한 발레리나를 화면 중심에 세우며 통념을 보기 좋게 뒤집는다. 작은 연습실에서 한쪽 다리를 올리고 균형을 잡는 인물은, 무거워 보이는 몸을 개의치 않고 놀라울 만큼의 집중력과 우아함을 보여준다. 164 x 116 cm의 작품 속에서만큼은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곳에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발레리나가 존재할 뿐이다.
보테로는 그녀를 통해 '아름다움'은 특정한 형태가 아니라 태도와 존재 방식에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가 분명 '풍만하고 볼륨감 있는' 몸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체가 자신의 몸을 긍정하는 태도 자체에 진정한 가치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보테로를 단순하게 「뚱뚱한 사람을 그리는 화가」로 기억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해당 작품에서 드러난다.
미의 기준은 과연 얼마나 절대적인가?
글의 서문에서 던졌던 물음이다. 오랫동안 가져온 의문이기도 하다. 어디에서도 답을 찾을 수 없어서 거슬리는 수준의 갈증을 느껴왔다.
그리고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 해방감을 느낀다.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래와 같은 생각이 든다.
미의 기준에 대한 절대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개인에게 큰 의미가 없다.
자신의 취향을 남들과 비교하고, 현재 어떤 아름다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으며, 그러한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지에 관해 집착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해당 주제에 깊이 파고들수록 만들어진 기준에 스스로가 갇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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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긍정하는 태도가 아닐까.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완전히 독립된 취향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고 지키는 것은 분명 의미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몸과 취향을 긍정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변화를 원한다면 그 시작을 페르난도 보테로와 함께하기를 추천한다. 그의 작품은 아름다움에 대한 오래된 감각을 유쾌하게 흔들어 놓는다. 인물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거리가 멀지만 위축되지 않는다. 당당한 자세와 표정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상적인 조건들이 순간적으로 무의미해진다.
「페르난도 보테로: 형태의 미학」 전시는 8월 30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