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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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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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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에 매료된 박찬욱 감독


 

1979년,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와 팔레스타인 혁명조직 사이 이중첩자가 된 영국 여성 배우 ’찰리(플로렌스 퓨 배우)‘의 이야기. 스파이 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 원작(1983년)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민감한 분쟁을 균형감 있게 보여줄 뿐더러, 첩보와 로맨스가 엮여 있는 동시에 픽션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등 복합적인 요소가 많아 어려운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은 원작을 읽자마자 영상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이 이 작품을 맡아서일까, 그가 초반부를 담당한 HBO 드라마 <동조자>(2024. 이 또한 동명의 원작이 있는 스파이 이야기로,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남과 미국 간의 관계를 보여준다)처럼 <리틀 드러머 걸> 또한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큐브를 맞추는 듯한 스토리텔링 기법(+훌륭한 음악, 미술, 연기) 덕에 무척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가짜 커플 되기


 

드라마는 네 명의 형제 중 장남 ‘칼릴(샤리프 가타스 배우)’이 보스인 팔레스타인 혁명조직이 서독의 수도인 본에서 이스라엘 노무관에게 저지른 폭탄테러를 기점으로 시작된다. 혁명조직 네 형제 중 막내인 ‘쌀림(아미르 카우리 배우)’이 여자친구 ‘안나 비트겐(극중 네덜란드인, 이븐 아컬리 배우)’과 함께 그 일을 저지른 걸 파악한 모사드의 고위요원 ‘마틴 쿠르츠(마이클 섀넌 배우)’는 그 커플을 통해 조직에 침투하고자 팀을 꾸려 그들을 추적하는 동시에 그들을 모사한 가짜 커플을 구상한다. 그리하여 모사드의 비밀 요원인 ‘가디(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배우)’가 평소 팔레스타인 혁명조직의 이념에 동화되어 있던 배우 ‘찰리’를 몰래 포섭하기 시작한다. 찰리는 미스터리한 그에게 끌려 아테네로 향하고 거기서 의혹이 싹트던 중에 마틴과 조직원들을 만나게 되면서 자기가 어떤 일에 연루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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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드는 사기나 다름없는 수법으로 찰리를 끌어들인 셈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에 왜 영국인을 끌어들이는 걸까(드라마를 다 보고 역사적 사실들을 얄팍하게 찾아보면서 영국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모두를 배신했던 세계대전의 역사를 알게 되니 지금은 이 자체로도 일종의 상징처럼 보인다), 의아해지려는 찰나 많은 비밀들이 밝혀진다. 남들에게는 아버지가 감옥에 가 있고 집에 체납 딱지가 붙었다고 자신의 가정환경을 설명하곤 하던 찰리가 실은 자기 삶이 너무나 평범해서 그런 거짓 설정을 임의로 덧붙여 연기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모사드가 밝혀내는 지점부터다. 그녀가 팔레스타인 혁명조직의 이념에 이끌리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패션처럼 내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냐는 모사드 팀원들의 심문-자아비판이 생각나게 하는 시간-이 이어지면서 찰리는 자기 신념에 대한 혼란에 빠지고 결국 그들 팀에 합류하게 된다.

 

 

 

현실로 흘러들기 시작하는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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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매력적이었던 부분은 현실에 픽션을 덧대는 설정이다. 모사드는 찰리가 쌀림의 연인이었다는 설정(안나는 쌀림과 바람난 대상으로 밀리고)을 밀고 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가디는 신참 스파이 찰리를 쌀림의 연인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본인이 쌀림 행세를 하며 쌀림의 이야기(이때 쌀림은 이미 모사드한테 붙잡혀서 각종 정보들을 진술하고 있었다)를 그녀에게 전달한다. 혁명조직에 잠입하기 위한 가짜 연인 행세를 하게 된 것인데, 문제는 그 둘이 서로에게 마음이 생기면서부터다. 찰리 뿐만 아니라 가디도 마음이 흔들리지만 요원으로서 그녀에게 여러 명령을 하며 거리를 두려고 한다.


점점 픽션이 현실의 공백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위력이 생기면서 찰리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연인이었다는 설정을 유지하고자 모사드 팀원들은 약을 먹여 재운 살림의 알몸을 찰리에게 보여주며 각종 흉터, 상처, 특징을 확인시키고, 편지까지 따라 쓰게 한다. 이 부분에서 플로렌스 퓨 연기가 압권이다). 하지만 그 혼란은 찰리가 성장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디와 동행하던 찰리는 어느새 혼자서 임무를 맡게 되고, 과감하게 행동할 뿐더러, 나중엔 모사드도 예상치 못했던 칼릴 조직원들의 심문도 견뎌내 신뢰를 받아 레바논의 혁명군 훈련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때부터는 모사드도 찰리를 믿을 수 있을지 점점 의문을 갖게 되면서 찰리는 양쪽 모두에 연루된 사람으로 거듭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과 그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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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레바논에서의 훈련을 거치고 민간인 거주지에서 칼릴의 누나 ‘파트메(루브나 아자발 배우. 낯이 익다 했더니 작년에 인상 깊게 본 영화 <그을린 사랑>의 주연이었다)를 만나는 부분부터는 테러조직으로 일컬어졌던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걸 보여주면서 이제 혼란은 관객한테 주어진다. 이 혼란은 균형이 맞춰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쭉 모사드, 즉 이스라엘의 관점으로 전개되던 드라마가 중반부터 팔레스타인의 관점으로 뒤바뀌며 이 첨예한 갈등이 양쪽에게 끼치는 피해가 어마어마하며 끝나기는 할까 의문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은 게릴라 방식으로 폭탄테러 공격을 한다면, 이스라엘이 공군 비행기로 융단 폭격을 한다는 차이에서도 이 갈등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을 준다. 이 부분은 픽션이 현실로 넘어가는 이상하고 슬픈 순간이기도 하다.


민간인 거주지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한 이스라엘의 폭격을 목격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진 찰리는 그 후 영국에서 칼릴을 만나 팔레스타인 혁명조직 일원으로서 폭탄테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때 다시 모사드 팀과 접촉해 가짜 테러로 위장시키는 데에 성공하지만, 찰리는 모사드의 최종목적, 칼릴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포섭해야 하는 잔인한 임무를 맡게 된다.

 

 

 

남는 건 역할 뿐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외부 갈등이 내면에 치닫는 드라마의 마지막화는 드라마 초반부 강렬한 색감의 컷들과 다르게 새벽의 칙칙한 회색 빛 속에서 진행된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 모두, 그리고 그걸 보는 관객의 내면의 색을 상징하는 것 같은 회색 빛 속에서, 칼릴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와 사랑을 나눠야 하는 찰리의 배역은 너무나 잔인할 따름이다. 모사드한테 포위된 상황을 뒤늦게 깨닫고 혼란에 빠진 칼릴이 찰리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찰리가 ‘배우’라고 내뱉는 대사는 극도로 비극적이다. 그들은 선조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미뤄둔 잔재들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기를 선보여야 하는 배우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떤 픽션, 연기로도 보호받지 못하고 무참히 살해되거나 파괴될 따름이다. 결국 남는 건 어중이떠중이들 같은 역할 뿐이다. 누군갈 이용할 수 있고 끌어들일 수 있으며 죽일 수도 있는 역할들. 수없이 역할을 떠맡곤 했던 찰리는, 전쟁통에서 작은(리틀) 북은 두드리며(드러머) 행진하던 그 여자 아이(걸)는, 그 후 그렇게 남겨진 역할들과 악수하지 않는 쪽을 택하지만, 이미 벌어질 일들이 벌어진 후이다.

 

 

 

자비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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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이 아닌 미결을 향해가는 드라마, 복수와 복수가 대응하는 세계를 담은 드라마는 이 잔인성이 보편화된 현실로 굴절된다. 픽션보다 무섭고 엄정한 현실 앞에서 나는 자꾸만 무용하게 느껴지는 ‘자비’라는 단어를 되뇌이게 된다. 복수가 끝없이 펼쳐지는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복수의 여신들’이 ‘자비의 여신들’이 되었듯이. 하지만 누가 그 여신들을 중재하는 아테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테나가 없더라도 그 여신들을 공경하는 시민들이 많다면 복수의 여신들도 스스로 자비의 여신들이 되지 않을까, 유난스러운 희망을 품어본다.

 

현재 OTT 플랫폼 왓챠에 감독판이 공개되어 있으며, 올해 1월 30일에 공개가 종료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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