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연주자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침묵의 공연이다. 자칫 공연 사고라고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공연의 침묵은 공백이 아니다. 공연 시간 동안 청중들의 의자 소리, 숨소리 등이 공간을 채우며 새로운 예술을 탄생 시킨다. 존 케이지는 ‘공간 자체가 소리의 일부‘라고 정의했다.
2026 선우정아 미니 콘서트 <너의 사랑이 또 나를 살리네>는 존 케이지의 공연처럼 침묵마저 음악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었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졌고, 콘서트 장은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해 거센 바람에 장소에 도착했을 땐 볼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약 200석의 아주 작은 콘서트 장 안으로 들어갔을 땐 추위는 다 잊을 만큼의 아름다운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유리 돔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바깥의 주변 나무들과 마른 풀들이 투명하게 비쳤고, 공간 한가운데 반짝이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치 영화 <그린북>에서 주인공 ‘돈 셜리‘의 공연장을 보는 듯한 클래식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자리마다 마련된 ‘너의 핫팩이 나를 살리네’가 적힌 센스 넘치는 핫팩과 따뜻한 방석, 폭신한 담요를 덮고 몸을 데우고 있을 때 조용히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이내 자리를 고쳐 앉았고, 첫 곡인 ‘lovemyself’가 시작되었다.
굉장히 저음으로 시작되는 노래이기 때문에 처음엔 마이크가 작동이 안 되는 줄 알았다. 아주 작은 소리가 이어지는 음악에 공연장 전체는 숨을 죽인 듯 고요함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모두 한 사람을 향해 눈과 귀가 모여 있었다.
어색하기만 하던 조용한 공연장은 이내 그녀의 목소리와 피아노 소리에 집중하게 되었고, 단 한순간이라도 가수의 얼굴을 보기 위했던 그동안의 공연과는 다르게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되었다. 어쩌면 눈을 감는 행위가 그녀의 목소리와 피아노 소리에 더 집중하길 바라는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놀랍게도 눈을 감자, 공간의 모든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마른 나뭇잎들의 소리, 아주 작은 유리 틈 사이로 들어오는 공기 소리, 옆 사람이 숨죽여 눈물을 훔치는 소리까지 고요하고 깊게 전하는 선우정아의 음악과 함께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살아있는 음악’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피아노 음이 끝까지 울려 퍼질 때까지 지속되는 침묵에 천천히 눈을 떴다.
유리에 비친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들이 보였고, 이내 잔잔한 박수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점이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아이러니하게도 ’침묵‘이라고 답하고 싶다.
침묵은 어떤 면에서 가장 강력한 대화의 기술이라고도 불린다. 적절한 타이밍에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침묵함으로써 분위기를 리드하고,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때론 무언가 고민이 있는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말할 때 가만히 들어주는 침묵만으로도 용기와 힘을 주곤 한다.
<너의 사랑이 또 나를 살리네>라는 콘서트 제목처럼 선우정아는 공연이 끝날 무렵 청중들에게 여러분들의 사랑 덕에 지금처럼 살아있다. 고맙다.라는 작고 담담한 고백을 했다.
아마 그 따뜻한 마음은 청중들도 선우정아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서로를 존경하고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마치 리허설이라도 한 듯 고요함이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티스트와 청중 모두가 하나가 되어 침묵을 유지함으로써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듣고, 말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공연이 끝날 때쯤 작은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은 참 이상하게도 차가운 성질임에도 마음을 포근하게 만든다. 고요한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질 때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스노볼 안에 있는 눈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2026 선우정아 미니 콘서트 <너의 사랑이 또 나를 살리네>는 새해의 싱숭생숭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조용한 설원 같은 공연이었다. 차가운 눈밭이라는 현실 속에 있어도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라이브에 온몸이 따뜻해지는 귀한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