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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영화를 보는 내내 섣불리 알려고 했던 나 자신이 떠올라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주인에게 성명서가 날아 들어온 순간부터, 그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순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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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대답게 활발한 주인의 모습을 따라가는 초반부로 영화가 열린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을 던지고 발차기를 연습하는 주인은 늘 숨이 차고 볼이 빨갛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깔깔대고, 남동생과 엄마가 있는 집에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모두가 공유하는 추억 속 '체육부장' 같은 모습에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자리에 놓인 사과를 보고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주인의 모습은 또 달랐다. ‘장난’이라고 웃어넘기는 모습에서는 어떠한 ‘신호’를 느꼈다. 주인이 속한 무리도 독특했다. 하나같이 무언가를 거쳐온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무슨 이유로 모였으며, 다 함께 빈집을 청소하는 건 왜일까.

 

영화에서 말해주지 않는 게 있음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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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가는 건 한순간, 그것이 와장창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주인에게 수호라는 아이가 성명서를 건넨다. 따라다니며 눈 앞에 들이민다. 주인의 세계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고, 잠시 무너진다. 주인은 결국 세차장에서 자신의 앞에 있는 엄마, 태선을 향해 절규한다. 세차장의 소음에 먹혀들어 가는 주인의 비명에 숨이 막혔다. 이내 영화는 정면에 고정된 태선의 눈동자를 백미러를 통해 비춘다.

 

모녀는 세차장을 몇 번을 찾았을까. 그때마다 주인의 무너짐을 ‘애써 바라보지 않는 것’이 태선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울음을 그친 주인에게 “한 바퀴 더 돌까?”라고 묻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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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반 친구 수호는 주인에게 너무도 갑작스러운 자극제다. 동시에 태선에게도 그렇다. 동생의 몸에 생긴 멍을 발견하고 어린이집을 찾은 수호를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태선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꼭 알아야겠다”고 소리치는 수호를 보며, 태선은 벽 뒤로 황급히 몸을 숨긴다.

 

소중한 존재의 멍 하나까지 바로 알아채는 수호 앞에서 숨고 싶은 마음. 죄의식은 그렇게 어느 날에 태선을 찾아와 괴롭힌다. 어린 수호의 울음에 술과 함께 삼켜보려 애썼던 그 모든 순간이 울컥하고 되살아난다. 그날 밤, 식탁 앞에 앉아 술병을 바라보던 태선이 벌떡 일어나 싱크대에 술을 따라 흘려보낸다.


영화는 아무렇지 않게 던져지고 회수되지 않는 말들과 그 폭력성을 꼬집는다. 또한, 단상 위 피해자가 마주하는 자기 의심과 불확신이 얼마나 캄캄한 것인지에 주목한다. 반 아이들과 법정의 어른들은 곧 사회의 시각을 대변한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주인의 모습이 전혀 ‘피해자답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로, 주인의 경험을 의심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잘 살아갈 수 있는지’ 질문한다.

 

끊이지 않는 질문은 미도가 참석한 법정에서도 계속된다. 왜 그런 일이 있고서도 연락을 지속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질책하는 변호사의 모습은 절망적이게도, 낯익었다.

 

‘사과’와 ‘편지’처럼, 싫다면 받지 않아도 되는, 어쩌면 주어지지 않았어야 할 것들이 주인과 미도를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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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의 마술쇼처럼 손가락 한 번 튕겨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가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남는 건 통탄이나 절망이 아닌, 주인의 청명한 삶이었다.

 

주인은 하루하루 자라나며 끝없이 다채로울 것이다. 사과와 쪽지 앞에선 찜찜해지고, 도망가고 싶어질 수 있다. 태권도장 구석에 그을린 자국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큰 것은 미도의 ‘살아있음’과 주인의 ‘사랑’일 것이다. 주인은 애인과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표현하고, 보고 싶은 아빠에게 문자를 보낸다. 그것이 바로 주인이 만들어 온, 만들어 갈 세계이다. 그 세계에는 시들 걸 알아도 계속 꽃을 사오는 태선, 해인의 환상적인 마술쇼 그리고 영화 말미에 탄생하는 생명이 있다.

 

그 세계에선 끊임없이 열매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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