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순서대로 들어야 맛이 사는 노래들이 있다.
그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플레이리스트를 듣는다.
중학생 때부터 플레이리스트를 즐겨 들었다. 한국사 공부를 할 때는 사극 배경음악을, 수학 공부를 할 때는 무아지경으로 손을 움직일 수 있는 록을, 밤늦게 집으로 가는 길엔 신나는 힙합을 들었다. 처음에는 한 가수나 작곡가의 음악만 들어있는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나중에는 한 가지 테마를 주제로 여러 가수의 노래를 모아 놓은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다. 다른 사람이 그 노래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어떻게 느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아니면 미묘한 감정을 담은 노래들까지도 묶여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대학에 가면 꼭 나만의 채널을 개설해서 내 플레이리스트를 자랑해야지, 싶었는데 입학 후에도 바쁜 일에 치여 잊고 있다가 몇 달 전에야 채널을 만들게 되었다. 구독자는 적지만 꾸준히 댓글도 달리고, 무엇보다 내 취향의 노래만 모여 있으니, 자기만족도가 높다. 여기에 채널을 직접 공유하기는 어려우니 내가 만든 플레이리스트 중 제일 처음 올린 것을 골라 각 음악을 소개하며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철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느낌이 중요하다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첫 곡이다. 도입부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보통 처음 듣자마자 이 노래, 좋다! 하고 꽂히는 노래를 제일 앞에 두는 편이다. 구독자도 얼마 되지 않으면서 훈수를 두기는 어렵지만, 수많은 플레이리스트를 들은 구독자의 입장이기도 한 내가 보기엔 첫 곡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보통 도입부가 인상적인 곡을 좋아한다. 가령 하모니카나 거문고 같은 독특한 악기를 내세우는 노래나 특이한 음색을 가진 가수의 목소리가 있다면 보너스다.
살면서 들은 음악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이 곡을 고를 것이다. 바로 'Big Wild'의 'Aftergold'다. 이 곡은 도입부에 신비로운 관악기 소리와 손뼉 치는 소리, 실로폰 소리 같은 경쾌한 멜로디가 귀를 잡아챈다. 그리고 노랫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래 안에서 서사가 느껴진다. 중간까지 듣다 보면 묘하게 동양다운 분위기도 물씬 풍긴다. 꽹과리 소리 비슷한 것이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감정이 고조되는 것이, 거침없는 바람에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마냥 시원하기만 한 노래도 아니다.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되는 노래가, 여름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콘셉트를 사수하라
첫 곡의 느낌을 담아 여름바람에 식은 살갗의 촉감을 플레이리스트에 담고 싶었다. 그리 시원하진 않지만 미지근한 그 공기를! 어떻게 하면 담을 수 있을까 이리저리 찾으러 다닌다. 다른 플레이리스트 제작자들이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첫 곡을 정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아주 열심히 검색한다. 정말 좋은 느낌을 받아서 기존에 알고 있던 노래만으로 리스트를 구성하는 때도 있지만 이렇게 한 가지 테마가 머릿속에 정해지면 노동 시작이다. 구글링을 통해 이것저것 찾아본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담은 노래가 있는지 찾아 나섰다.
그렇게 'Shigeto'의 'Ann Arbor Part 3 & 4'와 'Yosi Horikawa'의 'Bubbles'가 채택된다. 'Ann Arbor Part 3 & 4'에서 신시사이저와 절묘하게 함께 치고 나오는 LP 플레이어 소리가 마치 빗소리처럼 들린다. 'Bubbles'에서는 탁구공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면서 물방울이 튀는 것 같다. 소나기가 내렸다가 더운 바람이 불고, 공기가 멈춘 것만 같았다가 다시 흔들린다. 그런 순간을 기대하며 여름의 초입에서 더위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리스트를 짠다. 끈질긴 구글링의 성과다. 여러 음악을 듣고 그 곡을 리스트에 넣을지 말지 고민하면서 플레이리스트 제작의 마지막 단계로 향한다. 바로, 순서 정하기다.
끝과 처음을 기워내며
플레이리스트의 미학은 노래의 끝이 완전한 이별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한 곡이 끝나면 그 주제에 맞춘 다음 곡이 기다리고 있다. 다음 곡이 시작하면 우리는 무릎을 '탁' 친다. 아, 이거지! 앞선 노래의 여운이 끝나기 전에 다음 노래가 시작하면서 그 느낌을 이어준다. 듣는 이가 계속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플레이리스트다. 이런 구성을 짜기 위해 각 노래의 전체적인 흐름은 물론 처음과 끝이 잘 맞물리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앞선 노래가 데크레셴도로 작아진다면, 그다음 곡은 크레셴도로 점점 고조되는 노래를 고른다. 순서가 달라지면 느낌도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곡이 다른 리스트에 들어가 있어도 그 리스트는 들어 볼 만하다. 아예 다른 기분을 내줄 것이니!
한바탕 여름바람이 휩쓸고 간 'Aftergold' 뒤에는 다시 젖은 공기가 허공을 뒤덮는 'Ann Arbor Part 3 & 4'가 적절하다. 이 노래가 끝나고서는 떨어진 물방울이 땅과 물 표면에 튀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Bubbles'를 배치한다. 그렇게 자리를 정하고 나면 전체적으로 잘 이어지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이어 들어 본다. 역시 마음에 든다. 일반적인 플레이리스트에 비해 짧지만, 꽉 차게 마음을 울리는 구성이 완성된다. 적절한 섬네일 이미지를 넣어 올린다. 이렇게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올린다고 해서 내게 떨어지는 물질적 이득은 당연히 하나도 없지만 마음은 풍요로워진다. 나의 음악적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직접 느낄 때면 말이다.
음악은 그 자체로도 작곡가가 느낀 것을 감상자가 체험하게 해주지만, 플레이리스트는 감상자가 음악을 들었을 때 자신의 느낌을 새로운 감상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색다른 창조 활동이 될 수 있다. 내가 알던 노래도 새롭게 다시 들어보도록, 모르던 노래를 익숙하게 느껴보도록 도와준다. 노랫말이 없는 이 세 곡이 당신에게 어떻게 다가올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노래와 함께 감상하며 플레이리스트를 올릴 때의 감정을 한번 떠올려 주길 바란다. 여름의 시작에 올린 리스트를 겨울의 한가운데 듣는 기분은 어떨지! 공유해 준다면 더 좋다. 혹시 모른다. 당신이 새로운 영감을 받아 또 다른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