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왜 시인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범주화되는 장르의 전체 속에서도 시가 다른 무엇이 아닌 시로서만 자신의 공간을 전유할 때 언어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시가 시인 것은 몇몇 형상이나, 은유, 비교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시는 그 무엇으로도 이미지화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여야 한다. 즉, 언어는 그 자체가 문학에서 온통 이미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미지들을 담을 수 있는 언어, 혹은 현실을 형상화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그 자신의 이미지, 언어의 이미지일 수 있는 언어, 혹은 아직은 이미지라는 언어, 아무도 말하지 않는, 말하자면 그 자체의 부재로부터, 마치 이미지가 사물의 부재 위에 나타나는 것처럼 말하는 언어, 이렇게 사건들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기호가 아니라 이미지, 단어들의 이미지, 그곳에서 사물들이 이미지가 되는 그러한 단어들이라는 사실에서 그 현실이 아니라 사건들의 그림자에 말을 건네는 언어가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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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무엇을 이미지화하거나 무엇을 통해 이미지화되지 않는다. 이미지를 포착하여 언어의 층위로 옮기고, 그것으로 하여금 현실을 배태하게 하여 작가가 상망하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다는 예술의 맹목적 시선과 가능성에 안주할 수 없다. 언어가 그 자신의 이미지이며, 사물로부터의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의 부재 위에 나타나는 이미지를 말하는 언어가 될 때 언어는 자신의 부재를 처음부터 잉태함으로써, 자신의 부재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말하는 유일한 언어이고 다른 무엇이 아닌 시가 된다.
모리스 블랑쇼가 작품의 무한함과 정신의 무한함을 동일선상에 놓으며 정신이 작품 속에서 성취되는 것임을 말했던 것은 하나의 작품이 무한한 정신의 게슈탈트와 다르지 않다는 해석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다. 부분의 집합체가 아니기에 전체는 언제나 부분의 합을 능가하고 정신은 작품 속에서 성취되는 순간에, 혹은 이미 그전부터 작품을 전체로서 초월한다. 그런데 작품이 작품(자기 자신 혹은 다른 작품)에 의해 말해질 때, 작품은 전체를 초월할 수 있을까? 언어가 그 자신의 이미지일 수 있는 언어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자신을 말하는 언어가 되어 일종의 낙착을 이룰 때, 그것은 부재로부터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시작이 되어 작품을, 시를 초월하게 되는가?
시에서, 언어는 언어가 지니는 어떤 순간에도 결코 실제적이지 않다. 시에서, 언어는 전체로서 긍정되고, 그 본질은 이러한 전체 속에서만 실제성을 갖는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가 그 고유의 본질이 되고, 본질적이 되는 이러한 전체 속에서 언어는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비현실적이다. 언어는 이러한 비현실성의 총체적 실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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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실제와 비현실이기에 시는 전체가 되어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 언어가 언어를 초월할 때 부재의 현전으로서 시가 쓰여질 수 없는 까닭은 언어는 또한 정신의 게슈탈트의 전체 속에서 실제성을 갖고 본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가 그 무엇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여전히 시 속에서 남아 자신의 비현실성을 총체적으로 실현하게 되기에 그와 같은 구조를 고려한다면, 언어는 다른 무엇을 향하여 이동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를 말하는 존재이자 전체로서 긍정되며 독자는 작품 속에서 그러한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블랑쇼는 언어가 침묵하지 않는 것은 바로 침묵이 언어 속에서 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인이 시를 말하면 침묵의 본질로부터 멀어진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오직 자신을 말하는 언어.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작품은 마침내 그를 무시하고, 작품은 존재한다는 그 비인칭의 익명의 긍정 속에서 작품은 작품의 부재 속에 잠긴다. 그것뿐이다. 죽는 순간이 되어서만 자신의 작품을 끝낼 수 있기에 예술가는 결코 작품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지적은 뒤집어도 보아야 한다. 작가는 작품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죽는 것은 아닐까? 그 자신 이따금 가장 낯선 무위의 감정 속에서 그것을 예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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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무한한 관계들의 교차점에, 낯선 운명들이 교차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열린 장소에 위치해야 한다면, 그때 그는 사물들 속에 자신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고 흥겹게 말할 수 있다. 그가 "사물들"이라 부르는 것은 즉각적인 것과 미결정적인 것의 깊이에 불과하고, 그리고 그가 출발점이라 부르는 것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그 지점으로의 접근이며, "무한한 시작의 긴장" - 근원으로서의 예술 자체, 혹은 열린 세계의 경험, 진정한 죽음의 탐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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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부재의 현전, 부재로서의 현전이 시인의 시선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은 쓰지 못하고 바라본다. 문학의 다른 장르들이 죽음에서 가깝거나 멀다면, 시는 죽음으로부터 내도한다. 실제적인 것으로부터, 현실의 이미지로부터, 즉물성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언어는 오히려 무엇보다도 빠르게 사물을 향해 다가간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지점으로의 접근이 사물로의 접근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죽음에서 출발하여 죽음으로 회귀하는 언어는 일순간도 죽음과 다른 이름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근원으로서의 예술이 될 때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비추는 언어가 곧 시의 언어로 남아, 외부와의 관계를 맺는 모든 지점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표류한다.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시인은 시의 곁을 언제나 배회할 수밖에 없는가? 열린 세계와 죽음을, 그것이 지닌 내밀성을 가까스로 가늠하며 다만 응망하는 것. 끊임없이 서로를 교차하는 듯 보이지만 끝내 가닿지 못하는 문학의 근원과 더불어 시가 오롯이 전유하는 공간 속에서 무너지고 회귀하는 무엇을 바라본다.
글을 쓰면 쓸수록, 카프카는 점점 글을 쓰는 데 대한 확신을 잃어 간다. 가끔은 "일단 글쓰기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그 앎은 퇴락하거나 소멸할 수 없는데, 하지만 아주 드물게 한계를 넘어서는 무엇이 갑작스레 솟아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안심시키려 애쓴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위안이다. 글을 쓰면 쓸수록 그는 작품이 그 근원을 향한 듯 나아가는 극단의 지점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예감한 자는 그 지점을 무한의 공허한 깊이로서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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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것조차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님은 물론, 문학이라는 이름의 글쓰기는 글을 쓰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나 소망 따위와는 사실상 독립적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으로, 모든 글쓰기에 선행하는 이중적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인식은 불가능성에 가깝다. 블랑쇼가 말하듯, 예술은 그 자신에 대한 유일한 척도이다. 다른 무엇으로 규정될 수 없는 까닭에 그러한 부재가 현전하는 순간에도 언어가 자신을 말하듯이 예술은 자신을 말한다. 따라서 쓰는 것과 듣는 것이 동시에,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역경을 딛고 시인을 시를 쓴다.
시인은, 글을 쓰는 자는, '창조자'는 결코 본질적 무위로부터 작품을 표현할 수 없다. 근원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의 순수한 말을 결코 자신에게만 솟아나게 할 수 없다. 그러한 까닭에, 작품은 작품을 쓰는 자의, 작품을 읽는 자의 열려진 내밀성이 될 때에만, 말하는 능력과 듣는 능력 서로간의 이의제기를 통해 격정적으로 펼쳐진 공간이 될 때에만 작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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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부재의 현전 속에서 자신을 말하는 존재라면, 글을 쓰는 자는 언어라는 전체 속에서 결코 자기 자신을 지시하거나 홀로 솟아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비로소 시는 쓰는 자와 읽는 자, 말하는 능력과 듣는 능력 사이에서 작품으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전체로서 긍정되는 언어, 근원으로서의 죽음, 침묵과 회귀, 그 속에서 태어나는 불온함,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