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널 사랑해서 그런 거야.”
아, 이런.
또 시작이다. 분명한 사랑 고백인데도 듣는 순간 우리는 애틋함 대신 불안감에 휩싸이고 만다. 나에게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이번엔 어떤 용서를 구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이렇게 사랑을 면죄부로 써도 되는 걸까.
흔히들 사랑은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렇게 지구상에 완전히 개별적인 존재로 태어난 두 사람은 어느 날 운명처럼 만나고,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속 두 사람, 테드 크레이머와 조애나 크레이머 역시 미래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부부다. 그들은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고, 식을 올렸고, 빌리라는 예쁜 아들까지 낳았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한 가족의 이야기일 뿐이라면 영화의 제목은 <크레이머 대(versus) 크레이머>가 아니라 <크레이머 앤(and) 크레이머>였을 것이다. 대립과 불화를 상징하는 이름에 걸맞게 영화는 아내 조애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남편 테드를 훌쩍 떠나버리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회사에서 거대 프로젝트를 따낸 뒤 승진 소식까지 들고 집으로 돌아온 테드를 맞이한 건 이미 모든 짐을 싸둔 채 기다리고 있는 조애나였다. 영문을 몰라 하는 테드는 아내를 붙잡으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조애나의 태도는 단호하기 그지없고, 정신적으로 지극히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만 남기며 순식간에 사라진다.
“제발, 난 언젠가 창문으로 뛰어내릴지도 몰라. 그리고 이제 더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8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조애나는 일에만 정신이 팔린 남편 곁에서 몹시 우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녀는 잡지 예술부에서 몇 년 동안 일을 했고 그 일을 이어가고 싶어 했지만, 결혼 후 그만둬야 했을 뿐 아니라 그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들 남편은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다. 바쁜 테드는 집에 자주 들어오기는커녕 하나뿐인 아들에게조차 큰 관심이 없었고, 조애나와 빌리는 서로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것이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그래서 조애나는 떠났다.
“난 평생을 내내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 딸로만 지냈어. 우리가 같이 지낼 때도 난 내가 누구인지 몰랐고.”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자아를 찾고 싶어 했다.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한 명의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이 영화가 1970년대 작품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런 조애나가 어떤 상징성을 지닌 여성 캐릭터인지, 그리고 무슨 사회적 맥락에서 그녀에게 이 대사가 주어진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섬세하고 예민한 조애나와 달리 테드는 경주마 같은 사람이다. 광고계에서 15년을 일한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 자부심이 강하고, 오로지 앞만 보며 달린다. 그 덕분에 회사에서 인정받고 큰 계약을 따내긴 했지만, 그것이 그의 시야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가족을 돌아보진 못했다. “늦어서 미안해. 하지만 다 먹고 살자고 그런 거잖아.” 영화 초반, 조애나가 그를 떠나려 하자 테드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말로는 그의 아내를 돌려세울 수 없었다.
후반부의 양육권 재판 장면에서 조애나의 변호사가 폭력적인 기질이 있냐고 묻자 테드는 단칼에 아니라고 자른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기질이 있다. 그는 독선적이고, 다혈질이고, 권위적인 사람이다. 그에겐 상대를 향한 인내심이 부족하고, 조애나와 말다툼을 하게 되는 경우 언제나 목소리가 큰 테드가 그녀의 의견을 일축해버리는 식으로 끝난다. 심지어 조애나가 빌리의 양육권을 갖기 위해 다시 돌아와 만난 레스토랑 장면에서, 화가 난 테드는 유리잔을 벽으로 내던져 깨버린다.
앞서 사랑은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라 했지만, 조애나와 테드의 경우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더욱 불행해지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은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를 떠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해나갔다. 조애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심리치료를 받은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직업을 가졌다. 테드는 아들 빌리를 혼자 키우며 점차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게 됐고, 그러면서 자신을 떠난 조애나를 이해해나갔다. 빌리의 양육권을 두고 이루어진 재판에서 양측의 변호사들은 오로지 승소를 위해 상대측을 무시하고, 비난하고, 어떻게든 왜곡하려 들었지만 모순적이게도 바로 그 재판에서 조애나와 테드는 그동안 몰랐던 서로의 안을 들여다본다.
“당신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에서 실패하셨죠?”
“결혼은 실패였어요.”
“아뇨, 부인이 실패했죠. 당신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에서 실패하셨어요. 그렇죠?”
“.......”
“아냐(no).”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길었던 재판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서로 상대에게서 상처만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애증으로 범벅된 관계였긴 하나 테드와 조애나는 8년 동안 서로의 가장 내밀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기까지 했다.
양육권 재판은 결국 엄마인 조애나의 승리로 끝이 난다. 테드는 항소를 준비하려 했지만 그럴 경우 이번 재판엔 빌리까지 동원해야 한다는 변호사의 조언에 결국 포기한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테드의 변화된 태도와 빌리를 향한 그의 진심, 둘에 대한 주변인의 증언을 보고 들은 조애나는 테드를 찾아와 어렵게 고백한다. “빌리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는데, 그 애한텐 이미 집이 있더라고. 난 그 애를 데려가지 않을 거야.”
그리고 두 크레이머들은 깊게 포옹한다. 조애나는 빌리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홀로 먼저 자리를 뜬다. 영화가 처음 시작되고 조애나가 떠날 때 둘의 사이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잘라버린 것처럼 엔딩 역시 두 사람 사이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끝나지만, 그때와 달리 이 순간의 조애나와 테드는 단절된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크레이머와 크레이머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 짓는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그렇게 끝이 난다.
아름다운 영화다. 사실상의 스토리는 한 부부가 헤어진 후 자식을 두고 양육권 싸움을 한다는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이 전부지만, 그걸 뒷받침하는 색감, 음악, 연출, 연기 등의 모든 요소가 믿을 수 없이 감각적이고 뛰어나다. 하지만 이대로 이야기를 끝내기엔 우리는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을 잊고 있다.
빌리는 조애나와 테드 사이에서 난, 일곱 살 된 남자아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혹은 영화가 끝나고, 이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됐을지 궁금하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리뷰나 감상평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한 부부의 성장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맞는 말이다. 그들은 성장했다. 하지만 빌리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이번 글의 제목을 빌리를 생각하며 지었다. 과연 사랑이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빌리는 얼굴 보기도 어려운 아빠 대신 엄마에게 의지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엄마는 언제나처럼 그를 재운 뒤 말없이 떠나버렸다. “난 애한테 안 좋아. 내가 없는 편이 나을 거야.” 조애나는 테드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빌리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빌리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엄마가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만은 인지했다. ‘그날’ 전까진 엄마와만 살았지만, 이제는 하루아침에 아빠와만 살게 됐다. 평소엔 별다른 내색 없이 지내던 빌리지만 하루는 이렇게 묻고 만다. “아빠도 떠날 거예요? 엄마는 내가 나쁜 애라 떠난 거죠?”
그래도 거기까지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테드는 아들이 몇 학년인지도 모르는 무관심한 아빠였지만 조애나가 떠나고 빌리를 도맡게 되면서 점차 육아에 익숙해져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침울해했던 빌리도 다시 그 나이대 아이들처럼 활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때 조애나가 돌아온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빌리의 엄마고 그 애를 사랑하니까 다시 데려가 키우겠다고 주장한다. 테드는 반발한다. 그 역시 아빠로서 빌리를 사랑하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법적 소송을 벌인다.
이 모든 과정에서 빌리는 얼굴조차 비추지 않는다. 솔직한 말로 테드나 다른 누군가가 아이에게 너는 누구와 함께 살고 싶냐고 형식적으로나마 물어보는 장면이 한 번은 나올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지만. 빌리가 다시 등장한 건 양육권 패소를 받아들인 테드가 그 결과를 설명해주는 장면에서였다. 이제는 엄마 대신 아빠에게 정을 붙인 지 오래인 빌리는 얘기를 듣고 울음을 터뜨리지만 이내 받아들인다. 어차피 그에겐 언제나 선택권이 없었으므로.
빌리에게 모든 소식은 통보의 형태로 온다. 엄마가 떠났단다. 하지만 널 데려가지 않은 건 널 사랑해서야. 아빠가 너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건 바빠서란다. 그리고 그건 돈을 벌기 때문이야. 널 사랑하니까. 상황이 바뀌었단다. 이제부터 넌 다시 엄마와 살아야 해. 엄마의 집으로 옮겨갈 짐을 싸두렴. 그런데 잠깐, 엄마와 살기로 했던 걸 취소했단다. 엄마랑 아빠가 둘이서 얘기해봤어. 우리 둘 다 널 사랑하니까.
아빠의 곁을 떠나 이제는 낯설어진 엄마와 다시 살지 않아도 되게 됐으니 빌리에겐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맞는 일일까? 그 애를 사랑하고 그 애를 위한 결정을 하는 거니까 결과적으론 모두 좋은 일이 되는 걸까? 다시 한번 언급하는 거지만, 사랑이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사랑은 그 순결성과 고귀함 때문에 간혹 지나치게 신성시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은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떠올려야 한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다. 또 한 명의 작은 크레이머까지 포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