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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들어가며, 새로운 언어와 해방의 감각


 

일본어와 독일어로 글을 적는 다와다 요코, 그가 두 언어 사이 놓인 다리를 수도 없이 오가며 펼친 풍부한 사유가 이 책 "영혼 없는 작가"에 담겨 있다. 에세이와 자전적 소설 사이 어딘가에 놓인 듯한 글들을 읽으며, 나 역시 언어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그의 경험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요코는 모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할 때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 말은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의 고역을 떠올리면 해방감 같은 좋은 감정을 쉽사리 떠올리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낯선 세계에 온 몸을 던져 부딪히는 경험은 가장 먼저 불편함 내지는 어색함을 불러일으킨다. 처음 쓰는 발음 기관을 움직이느라 혀가 얼얼해지기도 하고, 원하는 만큼 유창한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답답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모든 언어 학습의 출발은 단어 암기부터라지만, 그 많은 단어를 하나하나 외운다는 게 가끔씩은 힘빠지는 노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요코가 던지는 역설은 꽤 설득력이 있는데, 해방감과 자유 같은 것들이 편안함과 반드시 동의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루소가 말하듯이, 인간이 꼭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더라도 타자에 의해 규정된 삶을 살아가거나 자신의 욕망에 무분별하게 종속된 채 휘둘린다면, 그것은 곧 노예 상태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어를 내뱉을 때 사슬에 매인 듯한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모어는 우리를 커다랗게 둘러싼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되어서, 사고의 범위를 딱 공간이 허용하는 만큼으로 제한한다. 그러니까 모어를 거쳐 나오는 말들은, 우리 자신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보다도 언어 자체에 내재한 관성적인 사고방식의 편린일지도 모른다. 화자와 언어의 위치가 전복되어, 언어가 화자를 거쳐 말하게 되는 것이다. 요코는 이렇게 덧붙인다.

 

 

"모어에서는 단어들이 살마다 꼭 붙어 있어서 도대체 언어에 대한 유희를 하는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모어에서는 생각이 단어에 너무 꼭 들러붙어 있어서 단어나 생각이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수가 없다. 외국어를 쓸 때는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 같은 것을 갖게 된다. 이 제거기는 서로 바짝 붙어 있는 것과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을 모두 떼어놓는다." - 48p

 

 

[크기변환]영혼없는작가+앞표지+띠지.jpg

 

 

돌아보면 나에게도 외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더 자유로워진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할수록 친구들에 대해서는 더 잘 알게 되었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된 내 모습은 항상 너무 낯설어서 나 자신은 오히려 점점 생경해졌다. 아마 그 이유 중 하나는 영어라는 다른 언어를 통해 맺은 인간관계에서 나와 한국어 화자인 나 사이의 괴리가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일례로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나는 '직설적인 사람'이었는데, 평소의 나를 떠올려 보면 결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다. 동방예의지국의 한국어 자체가 수식이 다채롭고 우회적이라는 언어적 특성을 지녔지만, 충청도 출신이라는 지리적 배경까지 고려한다면 나는 그중에서도 더 많이 돌려 말하는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떠올려 보면 그때는, 말을 내뱉을 때 불필요하게 배려하면서 오는 스트레스를 느꼈던 적이 거의 없던 것 같다. 정말로 직설적인 사람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힘 들이지 않고 말하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했는데도, 모어의 특성에 갇혀 있을 때는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던 나의 장벽이었다. 물론 어쩌면 이는 유창성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풍부한 영어 표현 방식을 알았더라면 한국어로 말하듯 우회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라는 언어가 가진 특성 때문일까, 다른 언어로 말할 때는 화자로서의 나 자신 역시 분명히 변화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어를 말한다는 것은, 언어 자체의 어색함이 불편하고 답답할지는 몰라도, 자아를 확장할 때의 해방감을 준다.

 

 

 

떠나기 위해 두고 와야만 하는 것들


 

핵심은 단순히 새로운 외국어를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요코가 말하는 해방감이 그저 이주의 경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추측하기 쉽다. 그에 따르면,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가는 육체는 영혼이 따라오기 힘든 너무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때문에 영혼이 그 안에 머무르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복잡한 관계가 있는데, 떠났기 때문에 영혼이 없다기보다, 사실 영혼이 없어야지만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떠올려 보면 몸은 다른 곳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굳어진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여행지에서도 마음을 꽉 닫은 채, 언어도 문화도 사고방식도 배우지 않으려는 경우도 많다. 우리의 영혼은 새로운 장소에서 마치 바뀐 온도에 적응하듯 수축하고 팽창하곤 한다. 그렇게 변화하는 영혼을 다 수용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조금은 빈 공간을 남겨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떠나야지만 자유로워진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진짜로 떠나고 싶은 거라면 낡은 영혼을 비우고 새 영혼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떠나고 싶다면 결국 무언가를 두고 올 수밖에는 없다. 그래서 요코의 해방감은 외국어 그 자체가 아닌 전환으로부터 온다. 독일어를 쓴다고 해서 자유로워지고, 일본어를 쓴다고 해서 틀에 박히게 되는 건 아니다. 그가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일본어를 두고 독일어를 선택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령 그가 다시 일본어로 말하게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이번에는 '일본어를 두고 선택한 독일어'를 두고 다시 일본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중 언어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된다는 것, 그리고 진열장에서 예쁜 찻잔을 고르듯 경계를 불문하고 가장 적절한 단어를 고를 수 있다는 것,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를 더 많이 배워 볼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고등학교 때 프랑스어를 배웠는데, 그래서인지 요코가 처음 독일어를 배울 때 단어에 성이 있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낀 경험이 크게 공감되었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시스템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 탓인지 몰라도 특정 단어들이 왠지 여성 혹은 왠지 남성일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무의식 속에서 고착화된 고정관념이, 프랑스어와 친숙해지며 느낀 언어의 생동감을 만나 단어를 외울 암기력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 여자가 연필에 대고 욕을 했을 때 문득 연필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연필은 또 남자로 느껴졌는데, 독일어에서 그것은 남성 명사이기 때문이다. (중략) 독일어 단어들의 문법 성을 익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단어와 성이 아무 관련이 없기라도 하듯 단어의 성을 바로바로 잊어버렸다. (중략) 이를테면 만년필을 보면서는 그게 실제 남자라고 느끼려고 애를 썼다. 남자, 남자, 남자.. 책상 위의 작은 왕국은 하나씩 성을 갖게 되었다.” - 44p

 

 

우리 교육 과정은 이상하리만치 제2외국어를 강조하는 듯한데, 막상 끝까지 입에 남는 언어를 찾기 힘들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세계 공용어인 영어만큼은 여전히 평생의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 언어 작가로서 다와다 요코의 삶은 크게 와닿는 면이 있으면서도 또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 역시 대학원에 다니고 학계에 남게 된다면 주로 영어로 된 글을 쓸 테니까, 앞으로 이중 언어 작가로 살아갈 일만 앞둔 셈이다. 그런데 요코가 독일어로 글을 쓰는 것이 고착화된 사고방식에 대한 저항이자 해방이라면, 나의 영어 글쓰기는 일종의 순응이자 항복이 아닌가(!) 학계의 중심이 미국이기 때문에 영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다니,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슬픈 이중 언어 작가의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틀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사유하는 요코의 모습은 내가 닮고 싶은 삶이다.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충분히 담기 위해 정성스레 말을 고르는 삶은, 고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파도 같다.


그리고 이중 언어 작가의 좋은 점이 하나 더 떠올랐는데, 일종의 도피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말실수라도 하게 되면, 제2외국어 핑계를 대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실수한 줄도 모르는 척, ... 웃어야겠다. 이 역시 작은 해방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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