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력 이미지가 남기는 잔상들
우리는 영화에서 ‘shoot’과 ‘shoot’ 사이의 수많은 이미지를 보고 소비한다. 스릴러의 한 장면일 수도 있고 로맨스, 혹은 추리하는 인물의 모습이 담긴 샷일 수도 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찍는다는 행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행위에서 무분별하게, 무의식적으로 폭력 이미지가 끼어 있다면 어떨까.
카메라 너머의 장면을 향해 ‘shoot’을 찍는 순간이 마치 총이 발사되는(shoot) 듯한 느낌을 받는다. (‘2000년 이후 한국 장르영화의 폭력 이미지 연구’, 김대방, 중앙대학교, 1p의 내용을 참고한 주장.)
이러한 폭력 구도는 영화가 상업적인 엔터테인먼트 산업이기 때문이다. 관객의 관심을 끌고 매혹시켜 수익을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담는 것도 좋지만, 대부분 폭력적이고 선정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장면화한다.
이에 관해서 허문영 평론가는 영화의 잔인함이 관객에게 소비되는 이유가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관객이 느끼는 심리적, 공간적, 계층적 등의 거리감에 따라서 영화의 폭력 이미지에 대한 수용과 거부의 판단이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거리가 너무나도 가까울 때면 관객의 ‘안전한 관람’을 방해받고 이내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즉, 영화는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게 생각하기에 폭력적이어도 쉽게 불쾌감을 느끼지 않고 재생산하고 이를 사람들이 재소비한다. 결국 영화에서 폭력의 재생산을 멈출 수는 없다.
2. shoot, and shoot
한 예로, 영화 〈서브스턴스〉가 떠올랐다. 2024년 말에 개봉해서 칸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다.

이를 영화의 폭력 이미지 소비로 생각한다면, 〈서브스턴스〉 역시 비정상적으로 신체가 변형되고 사람의 피가 공간 전체를 적실만큼 폭력적이라서 관객에게 소비된다는 것이다. 또한, 약물을 통한 새로운 존재의 탄생 자체가 SF적 상상력을 가지기 때문에 거리감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에는 젊고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의 수와 늙고 못나고 불완전한 모습의 엘리자베스가 나온다. 간단한 줄거리로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사용해 또 다른 나를 만들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대전제는 “당신은 하나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하나임을 망각하게 되자 시작된다. 결국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인간의 심리에서 터져 나온 폭력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바로 영화의 폭력 이미지에 대한 거부적 반응과 매혹적 반응이다.
영화에서 나온 엘리자베스의 파멸과 끝내 이르게 되는 죽음에서 관객은 사회의 잔혹함, 아름다움의 강요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잔혹하게 죽은 ‘수’는 어떨까. 역시 고어하고 충격적인 이미지로 소비된다. 특히, 알아볼 수 없는 괴물의 외형은 신체의 손상으로 인한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때 사람들은 엘리자베스와 수의 파멸에서도, 거부적 반응을 만드는 폭력 이미지에도 영화관을 나서면서 배우의 외모와 젊음을 검색하고 소비한다.
마가렛 퀄리 배우의 전작을 찾아보고 데비 무어 배우의 젊었을 적 모습을 평가한다. 잔혹하고 선정적인 무언가를 소비하는 모습을 통해서 또다시 그들의 파멸을 농락하는 듯한 대중의 모습이다. 이는 영화 스크린이 올라간 후에 전개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수의 첫 등장에 그야말로 ‘흠뻑’ 빠졌기에, 더욱 폭력 이미지 소비에 일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앞에서 허문영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영화의 결말에서 무대 장면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기에, 현실과 거리감을 두고 있어서 두 사람의 죽음에는 불쾌감보다 쾌감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영화의 결말에 던지는 메시지는 매혹적인 선정성으로 덮어씌워지면서 우리의 시선을 붙들게 된다. 계속해서 폭력 이미지를 소비하게 만든다. 즉, 영화 안에 담긴 폭력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영화는 구조 차원에서도 무차별적인 폭력을 일삼는다. 감독의 찍은 ‘shoot’은 여전히 관객을 표적으로 하여 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 콘텐츠가 소비하는 폭력 이미지는 단순히 오락적 요소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허문영 평론가의 시점 이야기를 가져와야 할 듯하다. 허문영 평론가는 거리만큼 시점이 관객에게 영향력을 끼친다고 말한다. 누구의 시점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라서 다른 정보가 제시되고 받아들여진다.
*
그리고 동시에 여러 시간을 점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제한 없는 시점 이동의 천국이기도 하지만 끝없는 비대칭의 지옥이기도 하다.”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자연에서 동물이 먹고 먹히는 관계를 생각해 보자. 초원에서 사자들이 얼룩말을 사냥한다. 이때 시점은 사자와 얼룩말 각각의 시점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줄 수는 있지만, 먹는 이와 먹히는 이의 모습을 동시에 점유하거나 둘 모두에게 매혹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니메이션 영화 〈마당 나온 암탉〉에서 일부 성공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잎싹’은 ‘초록’을 떠나보낸 뒤, 족제비의 새끼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다. 어떻게 본다면 앞의 서사를 무너뜨리고 감동을 부수는 지극히 폭력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관객은 다른 두 시점을 거의 동시에 점유한다. 먹는 자인 족제비에게도 감정의 샷이 생기고 먹히는 자인 ‘잎싹’에게도 감정의 샷이 생긴다. 이는 영화가 스토리텔링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잎싹은 자신 역시 자식을 키워본 입장에서 식량이 부족한 겨울을 나기가 힘들다는 점과 새끼를 향한 모성애의 강력함을 알고 있다. 영화에서 보여준 잎싹이의 행동을 통해서 관객은 이를 인지한다.
촘촘하게 쌓인 스토리텔링 안에서 자연 순리의 이미지가 사냥과 죽임이라는 폭력적인 장면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해석의 여지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 특별한 지점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찍을 때가 아니라 영화라는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즉, 영화가 폭력 이미지를 스토리텔링의 구조 안으로 들여보내서 사용할 때 영화적 서사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폭력 이미지의 객관성에 대해서도 고려해 봐야 한다. 사람 심리에서 정확하고 완전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폭력 이미지의 정도와 수치는 각기 다르다.
예를 들어 국가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 영화 〈서브스턴스〉의 경우 한국에서는 19세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프랑스에서는 12세 미만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다. 사회마다 같은 폭력의 이미지라도 다르게 받아들이면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폭력을 서사화할 것인지에 집중해야 한다. 단순히 폭력 이미지를 거부하고 비정상적인 결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회가 가진 분위기와 사람들의 사고방식 역시 포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