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간이 불가해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어도 심장을 관통하는 것만 같은 작품을 만난다. 샬롯 맥커너히의 ⟪늑대가 있었다⟫는 그런 작품이었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주인공 '인티'의 몸이 겪는 온갖 고통의 경험을 통해 활자 너머 미약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좀처럼 이 책을 덮을 수 없었다. 스토리의 흡인력도 대단했지만, 눈을 뗐다가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칠 것만 같았다.
⟪늑대가 있었다⟫는 묘한 향기를 풍기는 작품이다. 숲의 피톤치드를 깊이 들이마셨을 때 그 사이로 비릿한 피 냄새를 맡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평화는 순식간에 물러나고 기분 좋은 숲의 비린내가 서스펜스로 바뀐다. 숲을 밀어내고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야생으로서의 숲은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피의 향은 잊었던 긴장감을 쉽게 불러온다. 여전히 기묘할 정도로 자연은 고요하다. 멀리서 늑대가 보인다. 늑대가 피비린내를 몰고 온 걸까. 그것은 알 수 없다.
책을 읽는 내내 숲으로 걸어들어갔다가 빠져나오기를 반복하면서 등장인물들이 그러하듯 늑대의 실체에 대한 혼란과 함께, 자신의 취약함과 폭력성의 양립이라는 큰 모순을 발견하게 되었다. 머리 아플 정도의 고뇌를 향해 거침없이 줄거리가 전개되는 와중에도 작가 샬롯은 그 고통을 쾌감으로 바꿨다.
폭력과 사랑이 양립하는 자연의 소설
⟪늑대가 있었다⟫는 재야생화 프로젝트에 착수하고자 주인공 인티와 생물학자들, 그리고 14마리의 늑대가 스코틀랜드 고산지대 케언곰스에 찾아온 후 늑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인접한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사슴 개체 수 조절을 위해 데려온 늑대가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인티에게 늑대는 인간만큼이나 존엄하고 소중한 존재다.
인티는 늑대의 삶을 틈틈이 관찰하는 와중에도, 그가 관찰하는 늑대와 마찬가지로 죽음과 사랑의 경험을 시간차를 두고 경유한다. 가까운 이가 당하는 폭력, 목격하지 못했지만 인지할 수 있는 가족의 죽음, 강렬한 악의에 맞서면서 겪는 공포, 그리고 그 와중에도 찾아오는 강렬한 사랑까지. 여러 사건과 정보가 인티 주변에 쏟아지며 타인의 고통을 실제 자신의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인티는 강렬한 분노와 악의에 사로잡히게 된다.
인티는 동생이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자신과 다르다고 하지만, 사실 인티는 쌓일 대로 쌓인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런 그의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 건 그가 지닌 사랑과 공감이다. 인티는 늑대의 죽음을 직접 막거나 사람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개입해 저지하진 않아도 인간이 자연을 해치고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막고 싶어한다. 타인이 느끼는 통각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희귀 질환 때문에 타인을 죽일 수 없다고 해도 기저에는 선함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는 오로지 공감을 '당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마음과 감각이 있다면 충분히 서로 해치지 않으면서 공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작품의 결말부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인티의 쌍둥이 애기에 대한 인티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여동생의 고통을 곁에서 보고 느껴야 하기 때문에 애기를 보호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인티가 애기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인티는 늑대와 사람, 그리고 늑대가 잡아먹는 가축에게 영혼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인티는 단순히 사랑이 넘치는 평화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고통을 향해 걸어나가야만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이 있다는 걸 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하는 선택을 했을 때 드는 비참한 마음에도 인티는 숲으로 향한다. 늑대의 삶을 지키고 재야생화라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다. 사랑에 고통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 없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은 드물다. 사랑하면서 겪는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면 사랑이 떠나게 된다. 그것은 자연, 그리고 자연의 섭리에 맞춰서 살아가는 늑대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티는 그 삶을 존중한다. 그건 모든 것을 사랑해서 어떤 사태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평화라는 도달 불가능한 이상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모든 생명체는 사랑을 안다."는 구절처럼, 늑대도 사랑을 안다. 늑대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을 나간다. 그러다 보면 가축을 해칠 일도 생기고 어쩌면 불행히 마주친 선량한 마을 사람을 해칠 일도 생길 수가 있다. 우리는 응당 사랑이 온갖 것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늑대가 있었다⟫를 읽어 보면 폭력을 모든 순간 사랑으로 통제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가령 자연은 생태계의 균형은 먹이사슬의 균형으로만 맞춰질 수 있다. 삼림을 황폐하게 만드는 사슴의 개체 수를 줄이려면 늑대가 사슴을 잡아먹어야 한다. 그것 외에도 어쩔 수 없는 사정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티의 존재는 제어하기 힘든 이런 고통을 깊은 공감으로 조금씩 해소해 나가며, 끝없이 생산되는 폭력에 마주하는 이 공감의 힘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고 시간이 걸려도 서로의 합의점을 찾는 것이 바로 공감이자 공감의 결과이다. 자연은 이해나 공감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을 개척하고 정복하려는 인간에게 자연은 충분히 대화해야 할 존재다. 늑대와 대화할 수는 없어도 관찰과 연구를 통해 늑대의 습성을 이해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서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 서로를 경계하고 서로의 영역을 조금씩 돌려줄 수 있다.
⟪늑대가 있었다⟫는 현재이자 미래의 이야기다. 늑대와 같은 자연을 나누며 살아갔던 일을 과거로 만들지, 혹은 살아가며 우연이나 불행처럼 마주쳤던 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될지, 우리가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폭력과 사랑은 공생한다. 그 사이를 공감이 보완하고 연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