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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3년 연속 'Fringe First Award'를 수상한 화제작이 드디어 한국에 상륙한다. 뉴욕과 런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오리지널 캐스트 그대로 진행되는 내한 공연으로서, 5월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우정의 맹세놀이, 밧줄타기, 군인놀이가 전부였던 소년시절.

 

하지만 이 모든 놀이가 진짜 현실이 되고, 유년시절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 어렵게 된다면 어떨까요?

 

캠프파이어 앞에서 나누던 이야기에도, 엄마에게 쓴 편지에도, 좋아하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기도문에도, 이 두 보이스카우트는 그저 알려주고 싶었죠.

 

자신들이 얼마나 괜찮은 사내가 되었는지. 엄마에게 얼마나 크고 강한 사람이 되었는지. 보이스카우트 선서처럼.

 

- 시놉시스

 

 

전쟁은 소년을 어떻게 청년으로 만드는가?

 

연극 <소년에게서 온 편지 – 수취인불명>은 그 물음에 온몸으로 그려낸다.


작가이자 퍼포머인 클로이와 나타샤, 이 두 사람은 베트남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보이스카우트에서 처음 만난 소년들의 비극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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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어와 하모니카. 단 두 개의 소품만으로 이들은 전쟁터 한복판과 보이스카우트를 오가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많은 공연을 보았음에도 이토록 극한의 소품만을 가지고 생동감 있게 장면을 그려낸 극은 처음이었다.

 

'피지컬극'이라는 이름처럼, 클로이와 나타샤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발을 구르는 거대한 소리와 힘으로, 보이지 않는 풍경을 몸으로 선명하게 표현해낸다.

 

공연은 1960년대 베트남전쟁 시기, 충성스러운 보이스카우트 단원 ‘그래스하퍼’와 ‘에이스’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에이스는 이름 그대로 단연 돋보이는 소년이다. 보이스카우트 배지를 옷에 빽빽하게 단 것은 물론, 하모니카와 침 뱉기 등 못하는 것이 없다. 반면 그래스하퍼는 어리숙하고 겁많은 어린아이다.


그러나 이 둘이 ‘진짜 남자’로 거듭나기 위해, 린든 B. 존슨을 만나기 위해, 가슴 속 키우고 있는 충성심만큼은 전쟁터에 참전한 군인 못지않은 용기이다. 클로이와 나타샤는 이 두 소년들을 온몸으로 연기하며, 무대를 구르고, 하모니카를 불고, 손끝으로 환상을 그려내며 또렷한 눈빛으로 이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1. 소년은 어떻게 청년이 되어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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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관람하다 보면 어딘지 시공간이 어긋나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소년은 잠든 교관을 피해 숨 막히는 모험을 하는 보이 스카우트 단원이기도, 보초를 서며 전쟁터를 지키는 군인이기도 하다.


그래스하퍼는 에이스를 무척이나 동경한다. 에이스는 매우 터프하며, 스카우트 단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고, 군인 아버지와 형들 밑에서까지 자란 인물이다.


연극을 보며 우리는 충분히 주입된 남성성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것을 충실히 수행하려다 결국 파열되고 마는 소년들의 상처와 비극을 목격하고, 자연스럽게 그 감정에 이입하게 된다.


 


2. 베트남전쟁과 린든 B.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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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제를 드러내는 데 있어 린든 B. 존슨과 베트남 전쟁이 채택된 데에는 분명한 서사적 의도가 있다. 그래스하퍼와 에이스가 동경하는 린든 B. 존슨은,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으로서사회 복지 제도를 확대하고 구조적 불평등 해소를 시도한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베트남 전쟁을 대규모로 확전시킨 주체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사상 첫 '패배'로 기억되는 전쟁이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주도하며 부유한 군사 강국으로 도약한 미국에게, 전쟁은 곧 명예와 정의의 상징이었다. 특히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공산주의에 맞선 세계적 리더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부여받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당연하게도 자부심이 깊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그러한 신념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정의도 명예도 아닌, ‘민주주의’라는 허울 아래 국익과 패권을 위한 개입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살펴보았을 때, 그래스하퍼와 에이스가 그토록 동경했던 린든 B. 존슨, 즉 미국이자 강하고 정의로운 남성의 이미지로 표상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이데올로기로 강요되었을 뿐, 어린 소년들의 천진한 자아를 무참히 밟아버림을 알 수 있다.


닿지 않을 트럼본 소리를 존슨 대통령에게 들려주고 싶어 한밤중에 열차를 향해 연주하던 에이스는, 결국 한 부대를 이끌며 수많은 적군을 죽인 진짜 군인이, 진짜 남자가 된다. 자살한 동료와, 감염된 동료의 죽음도 맥주 한 잔으로 애도하며 전쟁 속을 거쳐간다.


 그러나 그렇게 남자다움을 수행하며 한 명의 어른이 되어버린 에이스에게 돌아온 것은, 무참한 죽음일 뿐이다.


그런 에이스가 총상을 입고 남긴 유언은, 엄마에게 저녁을 못 먹는다고, 존슨 대통령이 제 이름을 알게 해달라는 짧은 두 줄이다. 마치 보이스카우트 소년과 같은.


 


3. 부조리극, 누구에게 가닿는 편지인가

 

그래스호퍼가 극의 처음과 끝에 걸쳐 들려주는 거머리 우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녀는 절벽을 올라,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면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소년에게 말했다. 그러나 끝없는 절벽을 오르고 올라, 마침내 도달한 호수에 거머리는 없고, 이미 시간이 지나 부모님도 사라지고 없으며, 어른이 돼 자글자글해진 얼굴뿐이다.


아이들이 그토록 선망하고 되고자 했던 어른의 진짜 모습이란 그저 지치고 다친 군인의 뒷모습이다.


이 부조리함을 극은 비선형적인 시공간으로, 도달하지 않는 편지로,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사건으로 여실히 그려낸다.


결국 이 편지를 건네받은 사람은 관객이다. 전쟁이 명분으로 호명하는 것, 명예와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엔 누가 있었는가. 이 무의미함은 왜 계속되는가.


답은 공연이 끝나도 주어지지 않고, 관객은 이 편지의 답장을 계속해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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