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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읽었던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한 여자가 세 남자를 탑처럼 쌓아 업고 있는 표지는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돼지로 변한 남편 피곳 씨와 두 아들 사이먼이 어두운 집안을 씩씩대며 음식을 뒤지는 장면은 어린 내게 공표 영화 못지않은 섬뜩함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알록달록한 색채로 평범한 가정집을 그려냈음에도 그림 속엔 묘하게 차갑고 딱딱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또렷이 떠오른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 세계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전시 「앤서니 브라운展: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이 5월 2일부터 9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에서 열린다. 『돼지책』을 비롯해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260여 점의 원화가 총 8개 섹션에 나뉘어 공개되는 이번 전시는 우리가 그동안 사랑해온 이야기들과 그 안에 담긴 브라운의 상상력, 유머, 그리고 섬세한 메시지를 새롭게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상하지만 매혹적인, 초현실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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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y_s Pictures 2000 ⓒAnthony Browne

 

 

앤서니 브라운 하면 현실을 초월하는 이야기와 그에 걸맞은 초현실주의 화풍을 빼놓을 수 없다. 전시의 두 번째 섹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에서는 1970년~1980년대에 발표된 브라운의 초기작들을 조명한다. 특히 섹션의 가장 앞쪽에 배치된 그의 데뷔작 『거울 속으로』를 통해, 그림책 작가로서의 앤서니 브라운은 초기부터 초현실주의 미술에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년 토비가 어느 날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시작되는 이 이야기에는 비현실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오렌지 태양이 떠 있는 하늘, 쥐에게 쫓기는 고양이, 사람을 끌고 다니는 개가 있는 이 마법 같은 세계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현실의 규칙이 거울처럼 뒤집힌 세계를 체험하게 한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초기작만 아니라 앤서니 브라운이 그림책 작가로 살아오는 내내 브라운의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1997년 발표된 『꿈꾸는 윌리』는 그가 『공원에서』를 작업하던 시기, 슬럼프를 겪으며 그림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던 중에 쓰인 그림책이다. 발레리노가 되거나 거인처럼 커지거나, 사나운 괴물이 되기도 하는 윌리의 다채로운 꿈속 풍경은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 조르조 데 키리코, 앙리 루소 등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마음껏 그려졌다. 브라운은 이 작업을 스스로 가장 즐거웠던 작업으로 꼽으며, 다시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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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윌리』가 전시된 섹션 5 ‘글과 그림의 커뮤니케이션’에는 대각선으로 기울어진 거울, 독특한 각도로 사물을 비추는 거울 등 여러 형태의 거울과 함께, 하늘을 훨훨 나는 윌리, 그리고 『꿈꾸는 윌리』의 시그니처 바나나가 구현되어 있다. 엉뚱하고 이상하면서도 매혹적인, 그래서 그의 책을 읽을 때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특별한 매력을, 이번 전시를 통해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이라는 놀이, 셰이프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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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Grandad 2024ⓒAnthony Browne

 

 

앤서니 브라운의 창의적이고 기발한 표현 방식의 중심에 ‘놀이’가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는 상상력의 근원을 유년 시절 형과 함께 즐겨 했던 ‘셰이프 게임(Shape Game)’에서 찾는다. 이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하나의 추상적인 셰이프(모양)를 그리면, 그 모양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이미지를 상상해 완성하는 방식이다.

 

셰이프 게임은 브라운에게 창작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도, 이야기를 구상할 때도, 한 권의 그림책이 완성되는 모든 과정에 셰이프 게임의 아이디가 녹아 있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브라운에게 그림책 작업은 상상력을 통해 노는, 놀이의 연장인 셈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독자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듯 하다. 그의 그림책을 읽다보면 배경 속에 숨겨진 초현실적인 디테일을 찾아내거나 이스터에그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어떤 사물이 다음 장면에선 어떻게 변할지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게 되는 그 설렘과 호기심은 작가가 작업하며 느낀 기쁨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전시에 소개된 최신작은 2024년에 발표된 작품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부터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활발히 창작을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이러한 ‘놀이’에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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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후반부에는 이러한 브라운의 창작 원천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넓은 책상 위에는 알록달록한 색연필과 종이가 준비되어 있고, 벽면에는 하나의 모양에서 출발해 관람객 각자가 상상력을 더해 완성한 다채로운 그림들이 붙어있다.

 

관람객들은 이 셰이프 게임을 통해 작가의 창작 과정을 따라가 보며 앤서니 브라운의 흥미롭고 신비로운 그림책 세계에 더욱 깊이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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