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란 책장이 분홍색 책등으로 가득 차 있다. 지식을만드는지식('지만지')이 출판한 희곡집들이다. 국내 서점 중 지만지희곡 전집을 모두 들여놓은 서점은 딱 두 군데다. 교보문고, 희곡 전문 서점 인스크립트.¹ 올해 연희동에서 대학로로 자리를 옮긴 인스크립트는 연극, 영화, 문학 관련 도서를 취급하고 있다.
혜화 골목이 내다보이는 통창, 동그란 테이블 위에 놓인 추천 도서,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이 인상적인 이곳에서 인생 첫 희곡집'들'을 장만했다. '첫-'과 '-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글자지만, 동행과 도합 여덟 권을 사서 나왔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빨간 포장 봉투 안에 든 책들이 꼭 바게트 같았다.
그중 희곡집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를 가장 먼저 읽은 건 강렬한 분홍색 표지 때문이었다. 클로즈업된 얼굴, 유치한 이모티콘, "청년부"와 '미친'이라는 두 키워드가 주는 이질감도 시선을 끌었다.
책은 표제작을 포함해 다섯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작품을 다 읽었을 때 첫 번째로 든 생각. 많은 사람이 좋아할 희곡집은 아니다. 이어 두 번째로 든 생각.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내겐 가장 좋은 희곡집이다.
독자들은 희곡집을 고르면서 저마다의 기대를 품는다.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같은 명문이나 <오이디푸스 왕>처럼 역사가 오래된 비극을 원하는 식으로. 보통은 수수께끼처럼 오가는 대사들, 더 곱씹어 보면 의미를 알 것도 같은 알쏭달쏭한 문장을 기대하며 희곡집을 산다. 책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는 그런 기대를 충족해 주지 않는다. 알쏭달쏭하긴커녕 낯 뜨거울 정도로 솔직한 대사와 인물을 독자에게 들이민다.
가장 최근작인 <콜타임>의 주인공 은호가 특히 그렇다. 연극 <단이는 왜 20세기에 몸을 던졌나>의 조연출인 21살 은호는 배우 범순의 요청으로 콜타임 한 시간 전에 무대에 도착한다. 무대 위에 요가 매트를 깔아놓고 함께 몸을 푸는 둘의 모습이 퍽 어색하다. 40대인 범순이 애써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만 은호는 영 비협조적으로 군다. 범순이 "일요일 공연에서 대사 씹어가지고, 티가 많이 났죠?"라고 묻자 은호는 "예"라고 대답한다. 범순은 다시 묻는다. "누가 들어도 다 알 만큼?". 은호는 답한다. "예."
범순 조연출님은 어제 뭐 했어요? 아, 그런데 반말해도 되지?
은호 어.
(사이)
은호 어제 알바했어.
범순, 혼란스럽다.
(사이)
범순 아아, 알바…….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무슨 알바 하는데?
은호 동네에 있는 치킨집인데, 오래 일해서 이제 사장님이랑도 친하거든. (중략) 치킨집인데, 고구마튀김이 개맛있다. 놀러와.
이때부터 감지된 범순과 은호의 갈등은 연극 <단이는 왜 20세기에 몸을 던졌나>를 이야기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은호는 범순의 대사 실수를 위로하는 듯하면서, 범순이 일부러 그런 줄 알았다고 말한다. 누구나 그러고 싶을 때가 있지 않느냐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냥 아주 별거 아닌 대사로 만들어버리는 거. "배우들 가끔 그러잖아요. 그런 대사가 있으면 연출이랑 조율을 하면 되는데, 조율이 잘 안 되니까, 배우들이 약간 회피하는 식으로 그런 방법 쓰고 그러는 것 같아요. 뭉개고." 은호가 욕하는 대상은 배우가 아니라 배우가 회피하게 만드는 "구린 대사"였다. 은호는 여기에 덧붙인다. 동시대성이 없는 이 작품을 지금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범순이 당시엔 이런 연극을 쓸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고 변호하자 은호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은호 다들 그런 것만 쓴 게 아니라, 그렇게 쓴 것만 남은 거잖아요.
범순 ........
은호 누군가는 그 당시에도 분명히 자기가 원하는 걸 썼을 거예요. 시대의 분위기나 '문학이라면 자고로 이래야 한다' 하는 것들에 억지로 맞추려고 안 하고. 하지만 그 사람들이 쓴 건 잘 쓴 문학이 아니라고, 혹은 중요한 사람이 쓴 게 아니라고 여겨지니까 기록에 안 남고. 그니까 저희는 지금도 이런 거 하는 거잖아요. 누군가 버리고 남겨놓은 것만 하는 거예요.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은호는 왜 "구린" 연극을 올리는 팀에 들어온 걸까? 범순이 그 이유를 묻자 은호는 범순의 팬이었다고 고백한다. 범순은 당돌한 은호에게서 반짝거림을 보고, 둘은 결국 입을 맞춘다. 은호는 당돌하게 묻는다. "배우님 레즈예요?", "배우님 바인가?", "그럼 뭐예요? 디나이얼이세요?", "폴리아모리예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40대 범순에게 이런 단어들은 낯설기만 하다. 그때 연극 <단이는 왜 20세기에 몸을 던졌나>의 연출인 영두가 들어온다. 대본이 구리다는 조연출, 거기에 조연출과 키스한 배우라니.
이 연극, 잘 올라갈 수 있을까?
*
<콜타임>은 2022년 2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됐다. 거침없이 발화하는 '무대 위' 은호를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희곡집으로 먼저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희곡집은 공연의 일시 정지 버튼이기도 하니까. 이 문장을 다르게 말하면, "원래 공연엔 일시 정지 버튼이 없다'가 된다. 공연은 관객이 이야기를 충분히 소화하도록 기다려주지 않는다. 가끔은 그런 무대 위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심장에 찍어 누르기도 전에 대사가 도망가 버리니까. 내게 시간을 조금만 주면, 아주 조금만 주면, 평생 그 문장을 간직할 수도 있을 텐데.
반면 희곡집은 나를 서운하게 하지 않았다. 대사 사이 간격도, 암전 시간도 내 멋대로 정할 수 있었다. 배우가 한 대사만을 반복하게 할 수도, 좋은 대사가 있으면 공연을 멈추게 할 수도 있었다. 무대 위에서 발화됐다면 그저 흘려보냈을 문장을 심장에 꾹 찍어 누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 손안에 들어오는 이 일시 정지 버튼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희곡 전문 서점 인스크립트를 운영하는 박세인 씨는 희곡집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양산업의 대표주자로 얘기되는 책과 안 그래도 찾는 사람 몇 없는 희곡의 결합."² 그러나 장래가 어둡지만은 않다.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쓰인 글이니까. 인생 첫 희곡집을 막 장만한 사람으로서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연극과 뮤지컬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희곡집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이 사랑스러운 일시 정지 버튼이 당신을 더 풍요롭게 해줄 거라고.
참고 자료
김나윤. (2024. 8. 15.). [Interview] 어서오세요, 가장 가까운 무대에: 희곡 가게 '인스크립트'의 박세인 대표. 아트인사이트
박세인. (2023. 10. 26.). 아, 나는 배우이기 이전에 관객이었지.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