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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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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은 통한다. 순수한 어린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말에 허를 찔릴 때가 있고, 삶을 통달한 노인에게서 아이 같은 순진함을 느낄 때도 있다.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70살 춘자씨가 7살 아이가 돼 ‘시간 모험’을 떠나는 몇 시간 동안의 이야기이다.


춘자의 모험은 노인 실종 사건이며, 70에서 0을 빼 7살 아이가 된 것은 치매를 뜻한다. 아이가 된 춘자가 가고 싶어 하지만, 아직 어려 안 된다고 거절당하는 은빛가루 나라는 사후 세계를 암시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전화기를 통해 세상을 떠난 그리운 가족들과 재회하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 삶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걸 연상시킨다. 춘자의 내면에서 빠져나온 영혼의 물고기가 부르는 넘버 가사 ‘아이는 예쁘고 노인은 안 예쁘지.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노인은 보기만 해도 맘 아프지’는 재기발랄하지만 내용을 곱씹으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처럼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쉽고 편한 작품을 지향하는 것 같으면서도 던지는 화두는 진하다. 바보 같은 척 하는 사람이 날카로운 진실을 숨긴 것처럼, 겉으론 가벼워 보이지만 더없이 무거운 이야기를 다룬다. 판타지와 동화 풍, 가족극을 지향하지만 춘자를 보고 있으면 인간이 갖는 근원적인 외로움과 상실감마저 느껴져 마음 한 구석이 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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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오징어의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작이다. 2025년 2월 6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 더줌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주인공 춘자 역엔 서나영과 김소리, 큰아들 진수 역엔 성열석과 김준현, 작은아들 성찬 역엔 김대웅과 김선제, 큰며느리인 다정 역엔 강나리와 하미미, 식당 사장 백정언 외 다역엔 이상은과 서인권, 영혼의 물고기 외 다역엔 양나은과 엄현수가 출연한다.


소극장 창작 뮤지컬의 조상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뮤지컬 <빨래> 2005년 초연 당시 ‘희정 엄마’ 역을 맡았던 오미영이 극작‧연출한 작품이다. 춘자 역을 맡은 서나영 또한 <빨래>에서 ‘나영’ 역을 연기했었다. 따라서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에서 오랜 세월 관객의 곁을 지켜온 이들의 치열한 사유와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극은 치매, 싱글맘, 노인 실종, 노인 납치 등 무거운 사회 문제를 가벼운 척 터치하고 지나간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한 슬픔, 정체성 찾기,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모성, 두 종교의 경계선을 초월한 간절한 기도와 사랑에 대해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눈물샘을 건드린다. 하지만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는 자극적인 신파극은 아니다. 극은 춘자의 슬픔과 사랑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며, 감정을 느끼는 건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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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살 춘자가 자신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의 물고기’ 코딱지를 먹고 7살 아이로 돌아가 하는 모험, 정신은 어린 아이지만 거울 속 늙은 자신과 마주하는 장면, 기차역 시계바늘이었으나 지금은 자동차 와이퍼로 카센터에 사는 바늘들과 나누는 시간에 대한 대화, 소변 실수한 춘자 주위를 맴도는 파리(지앵)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신기한 전화기까지. 판타지, 동화 혹은 아동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면들도 많다. 이 장면들은 극의 색깔과 메시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늙는다는 건 슬프지만 마냥 아픈 것만은 아니고, 때론 유쾌하고 아름답다는 것.


춘자의 모험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춘자는 큰 나무 아래 양팔을 벌리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단 얘기를 듣고 큰 나무를 찾아 헤맨다. 한 목사가 주는 과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다르는 춘자. 그 곳에서 춘자는 큰 나무 아래 양팔을 벌리고 선 사람을 만난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다.


십자가 아래 예수처럼 춘자 또한 양팔을 넓게 벌려 보곤, 오랫동안 간직한 소원을 빈다. 불교이기에 자신이 아는 가장 신실한 방식인 108배를 하며.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넣은 장면이기도 하지만, 춘자의 절박한 기도를 듣고 있자면 웃음은 멈추고 눈물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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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춘자의 아들인 진수와 성찬)에게 비빌 언덕이 되게 해주시고, 큰아들인 진수의 마음에 뿌리내린 그늘이 사라지게 해달란 소원, 혹은 신을 향한 기도. 기억을 잃고 7살 아이가 됐어도 자식에 대한 사랑, 모성만큼은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어머니의 고백이기도 하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처럼, 일흔 살까지 살아남았단 십자가를 짊어진 춘자의 기도는 겉으론 덤덤하지만 울부짖음 같기도 하다. 극을 만들며 가장 공들였을 게 분명한 명장면이다.


어떤 이유로 죄책감을 안고 살며 마음속 그늘 또한 운명처럼 끌어안은 큰아들 진수. 하루아침에 무너진 가족의 삶에 진수 또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춘자는 어릴 때 진수를 그렇게 때렸다고 한다. 다 같이 죽으려고도 했지만, 어린 아들들이 눈에 밟혀 죽음이 아닌 고통스러운 삶을 선택한 춘자. 동생 성찬보다 불행을 상세히 기억하는 진수의 마음이 그늘진 건 당연하다. 춘자의 기도는 오랫동안 쌓인 진수와의 애증을 청산하고 싶단 뜻이기도 하다.


춘자와 진수의 몇 마디 대사들로 유추할 수 있는 모자의 서사와 감정선은 극에선 자세히 나오지는 않는다.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면 주인공인 춘자에게 쏠려야 할 집중이 흐려질 것이다. 극의 장르 또한 달라질 수 있어 작품 의도와 맞지 않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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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동화의 마지막 문장,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처럼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도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는다. 아들들과 며느리는 춘자를 찾고, 춘자는 평생 장사한 떡볶이 레시피를 기억해내 밀키트 사업을 시작한다. 어릴 때 엄마 떡볶이는 쳐다보기도 싫어했던 진수는 밀키트 사업을 맡으며 아픈 기억과도 이별하고, 성찬은 꿈이었던 가수가 된다. 춘자가 십자가 아래서 108배를 하며 소원을 빌었던 교회는 종교대통합 성지로 떠오른다. 치매 노인이 실종됐다 자식들에게 붙잡혀온 게 아닌, ‘7살 아이가 된 춘자가 시간 모험을 하며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용서하고 사랑했기에’ 맞이한 행복한 결말인 것이다.


춘자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리운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죽음이 두렵지만은 않단 뉘앙스의 대사가 나온다. 극은 이처럼 죽음조차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숭고한 건 춘자가 치열하게 살아낸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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