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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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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곳곳에서 여러 세력이 결집되고 결의에 찬 청년들이 투쟁의 선봉에 나서고 있다. 물론 그 청년들은 이 투쟁의 선구자이자 내 소설의 주인공인 모렐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건 중요치 않다. 마음이라는 것엔 다른 이름이 필요치 않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자신이 가진 최상의 것을 언제나 내놓았다. 삶이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자연적 아름다움을......"]

 

1956년 출간된 로맹 가리의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 로맹 가리에게 처음 공쿠르 상의 영예를 안겨준 책이자 사람들에 의해 최초의 생태학적 소설이라고 일컬어졌던 이 작품의 서문은 위와 같은 작가의 전언으로 시작된다. 그가 코끼리들은 결코 비유가 아니며, 바로 인권이나 마찬가지로 살과 피로 된 존재들이라고 한 것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것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수렴되는 이상 혹은 하나의 마음이 제각기 다른 이름들로 분파하여 저마다의 목소리가 매순간 공허해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연보호와 인권이 심각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현실을 들여다볼 때면 오히려 이상과 이상의 충돌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산재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그러한 찰나의 순간 속에서 (인류의 역사를 돌아볼 때) 방황하고 다시 길을 찾아가는 인물들이다. 아프리카의 코끼리 보호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누군가에게는 테제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신념이자 희망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사건 전체를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의 관점에서 해석하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으로 해석하든, 서구가 만들어낸 하나의 신화로 해석하든 그것은 모두가 현실이면서 동시에 이상으로서 기능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이상인지 구분하는 일이 과연 유의미한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늘이라는 이상을 향해 뻗어나간 저마다의 모든 줄기들에 그들을 지탱하는 저마다의 뿌리가 있는 것인지 혹은 하나의 뿌리로부터 생겨난 수많은 줄기들을 바라보며 실재하지 않는 뿌리를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 바이타리가 도무지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줄기를 표상한다면 모렐은 바로 그 하늘의 하나 뿐인 뿌리를 들어내고자 흙을 헤집으며 자신의 운명에 역행하는 줄기 그 자체다. 이때 이상과 현실의 기로에 선 줄기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에서 진보가 위치하는 곳은 (바이타리에 따르면 진보가 결코 일어나지 않는 곳이 바로 절제와 중도라는 지점이다.) 처음부터 그 뿌리가 분명한 경우가 극히 드물다. 일단 누군가가 걸어나아가고 나면 그 발자국이 진보가 되기도 하지만 진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걸음이 퇴행의 신호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줄기는 한번 그 자신의 뿌리를 인지하게 되면 멈출 수 없이 뻗어나가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따라서 줄기의 방향성이 둘 중 어떠한 것이든 앞서 언급한 두 인물 뿐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코끼리를 둘러싼 각각의 줄기로서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우리는 마천루와 자동차에 싫증이 나서 원시 속에 몸을 담그고,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과 동물 떼에 감동하러 오는 서구인들의 눈요기 노릇을 하는 데, 세계의 동물원 노릇을 하는 데 진력이 난 만큼 더더욱 능욕당한 기분입니다. 우리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이 점을 강조해주길 바랍니다. 우리는 아프리카를 야만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네 한가한 관광객들이 그렇게 찬탄하는 기린 목보다 공장 굴뚝이 우리가 보기에는 천 배나 더 아름답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멈추지 않는 것은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지구촌의 생태계에 대한 비가역적 손상의 징후 위에서 멈출 줄 모르고 곳곳에 공장을 지어댄 후 이제 와서 기린의 모가지만큼은 지켜주어야 한다고 외치는 소위 문명인들과 환경운동가들, 끝없이 반복되는 자연 보호에 대한 선전 문구들, 그리고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며 마지막 남은 자연의 땅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통은 반드시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나 자신까지도 어떠한 이유가 되었든 과거에 멈추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멈추어 서야 한다.

 

다시금 땅을 향해 고개를 처박는 줄기도 존재하는데, 움직임을 멈추어야 할 때 잠시라도 멈추는 법을 아는 줄기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상은 멈출 수가 없는 것이고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명의 프랑스 남자가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코끼리를 구하기 위해 인생을 내던지는 것이 곧 한 명의 다른 인간을 구하는 것이고 하나의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안다면 도저히 멈출 수 없는 하나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끝없이 죽어나가는 인간들의 절규와 맞닿아있는 작은 희망이 아프리카에서도 서구와 같은 진보가 일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임을 안다면 그때는 동정이 아니라 투쟁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슬람에서는 이것을 '하늘의 뿌리'라고 부르지요. 멕시코 인디언들에게는 이것이 '생의 나무'로, 모두들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눈을 들어 아프도록 가슴을 두드린다오. 모렐 같은 고집쟁이들이 청원서며 투쟁위원회, 보호조합 등을 통해 밖으로 드러내려 애쓰는 어떤 보호 욕구 말이오. 그들은 가슴속에 깊이 묻힌 이 하늘의 뿌리들을 드러내려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의 욕구, 자유 욕구, 또는 사랑의 욕구에 응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요.

 

 

모렐과 바이타리는 모두 그들의 뿌리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 다만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는 것이다. 더는 인간을 기다려줄 코끼리가 충분히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묻혀있는 코끼리의 시체 위에서 태어나 전쟁과 가뭄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뿌리를 들어내고 싶어도 들어낼 뿌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순간이 온 것인지.

 

한 시인은 하늘을 향해 피는 꽃이 지상에서 죽어가는 것이야말로 절망이라고 썼다. 그러나 뿌리는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언젠가 다른 무언가를 지탱하게 된다. 그것이 운명이다. 줄기에는 줄기의 운명이 있고 뿌리에는 뿌리의 운명이 있다. 당장은 운명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통해 한 인간과 더불어 그가 자연을 위해 남겨두어야 할 여유가, 그리고 마침내 한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 모렐은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는 수천수만 개의 줄기 중 하나로서 그의 행위가 그가 지닌 운명에 순응하는 것인지 또는 역행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어떤 인간이라도 죽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그 운명에 절망하지 않을 뿐이다.


 

절망해선 안 되지. 오히려 미쳐야 돼. 폐도 없이 땅 위에서 살아보려고 물 밖으로 배를 내놓고, 어떡해서라도 숨을 쉬어보려고 애썼던 최초의 파충류도 미쳤던 거지. 어쨌건 그래서 인간이 생겨나게 되었지. 항상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야.

 

 

다른 줄기들처럼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몸을 틀어 뿌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줄기란 바로 그런 존재다.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미쳤기 때문에 그는 저마다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하늘의 뿌리가 사실은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줄기를 타고 끝없이 올라가다 보면 반드시 닿게 될 하늘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뻗어가는 마음과 보이지 않는 뿌리를 상상하는 마음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결국 마음에는 다른 이름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모렐이라는 이름과 그가 남겨두고 떠난 뿌리로부터 다른 누군가가 태어나 새로운 코끼리 보호 운동을 펼치고 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동시에 바이타리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아프리카의 독립과 해방,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과 아프리카 사회의 진보가 여전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죽음 위에서 유예되고 있는지를 함께 기억하는 것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어야만 한다.


 

저 낙엽들은 뿌리로 내려가 실뿌리를 만나지 못하고 매립지로 실려가겠지요, 그런데 어디 낙엽만 그런 걸까요, 뿌리로,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무의 전생, 혹은 후생들이 찬비 내리는 보도 블록에 착, 달라붙어 있습니다

 

농업박물관 앞, 깨진 보도 블록 한 장을 들어내고 젖은 낙엽 한 장을 집어넣어주었습니다, 작은 장례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데, 나는,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는 것입니다

 

- <농업박물관 소식 - 거리에 낙엽> 부분, 이문재

 

 

뿌리까지 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보도 블록 한 장을 들어낸 후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여전히 내 운명 어디쯤에서 어떤 마음으로 헤매고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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