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자마자 아주 소중한 걸 발견한 듯했다. 무언가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다 날 것만 같은 경험은 쉽게 찾아오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창문이나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거나 물에 반사되어 춤추는 빛의 무대였다. 그 빛을 받으며 산뜻한 원색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아름다움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현실의 것을 포착한 듯했고 그래서 프랑스라는 장소에 대한 환상은 커졌다. 심지어 프랑스에서 지내는 동안에 영화를 보았는데도 ‘진짜’ 프랑스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사실’이란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믿음이라는 방증일까?
이러한 아름다움의 환각을 만들어낸 로메르 영화가 담아내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내가 가장 애정하는 영화 중 하나인 <비행사의 아내>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에릭 로메르의 ‘희극과 격언’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인 <비행사의 아내>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On ne saurait penser à rien)’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다.
극은 네 명의 남녀를 중심으로 서로 얽히며 진행된다. 유부남인 비행사 크리스티앙과 사랑했던 안느. 그런 그녀의 현 연인 프랑수아. 그리고 우연한 만남으로 이들의 서사에 개입하게 된 루시.
아내의 임신 소식을 전하며 완전한 이별을 고하는 어느 평일의 아침, 크리스티앙과 안느는 이제 서로를 멀리서 사랑할 것임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커피를 한 잔 내주려는데 요즘 자꾸 배관이 말썽이다. - 연인 집의 배관을 고쳐주려 배관공을 물색한 프랑수아, 배관공과의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안느는 연락을 하는 것도, 찾아오는 것도 아주 싫어한다 - 메모를 남기러 찾아간 그녀의 아파트에서 전 연인과 함께 집을 나서는 장면을 목격한 프랑수아. 기차역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마주친 프랑수아는, 저도 모르게 그를 미행하게 된다 - 버스에 마주 앉아 힐끗힐끗 쳐다본다. 루시는 크리스티앙을 미행 중인 프랑수아가 자신을 미행한다고 착각하여 말을 걸고, 자초지종을 알고 나서는 미행에 동조하게 된다.
#1. Reste - 사랑의 진실
대사 중 유독 자주 들린 단어가 있다. “Reste.” - “머물러.”
‘떠나지 말고 여기 머물러줘’라는 의미에서, 혹은 ‘나는 떠날 테니 너는 여기 머물러 있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언뜻 머물러 달라 부탁하는 쪽이 더 애절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머무를지 말지 결정하는 사람이 우위를 점한 것 같다.
그런데 <비행사의 아내>의 인물들에 대입해 보면, 이러한 추측이 성립하지 않는다. 머물러 달라 부탁한 사람은 그만의 매력으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서, 정작 난 언제든지 떠날 테니 넌 여기 머무르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Reste”의 두 용법을 지배한다.
전 애인을 항상 기다려왔던 안느가 그러했고, 하루 종일 미행을 계속하자고 프랑수아를 부추겼던 루시도 그러했다. 불쌍한 프랑수아는 크리스티앙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안느의 거짓말을 믿었고, 연애 관련 질문에 대한 루시의 천연한 답변도 믿었다. 나의 부름에 한걸음 달려온 줄로만 알았던 그녀들은 사실 그를 떠날 충분한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무 정보 없이 미행했던 크리스티앙에 대한 상상도 전부 사실과 빗나갔으니, 어쩌면 영화 전체가 프랑수아의 ‘오해 서사’이다.
#2. 관찰으로 조각되는 인간
로메르의 연출은 굉장히 간소한 편이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주 정적인 카메라가 인물을 담으며 숏트 하나하나의 길이가 충분히 길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미묘한 표정변화나 자세, 옷차림 등을 요목조목 뜯어볼 수 있다. 이러한 감독의 소극적 개입은 마치 우리가 영화 속 주인공들의 대화를 실제로 옆에서 엿듣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내밀한 대화와 공간을 공유하는 경험은 인물들을 캐릭터가 아닌 인간으로 보게끔 만드는데, 여기서 로메르 영화의 압도적인 설득력이 생긴다. 이미 내가 충분히 관찰한, 내가 아는 사람이 하는 행동과 말이니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인 것. 로메르의 영화도 그러하고,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보는 실제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실제처럼 보이는 허구를 얼마만큼이라도 믿었기에 우리는 그의 영화를 사랑했고 그 인물들 또한 그러했다.
#3. Paris m’a séduit
‘Paris m’a séduit’는 극 중 프랑수아가 머릿속에서 맴도는 듯 여러 번 휘파람으로 부르는 노래이자, 엔딩 크레딧에 삽입된 노래다. 번역하면 “파리가 나를 매혹했어” 이후 나오는 가사는 “파리가 나를 정복했어 / 파리가 나를 감미롭게 껴안았어”
파리의 매력에 빠진 화자는 파리에 머물러있다. 내가 파리에 머무르는 건 나의 선택이 아니다. 파리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파리는 왜 나에게 머무름을 허용했을까. 그의 매력을 왜 나에게 뽐내 보여서 나를 집어삼켰을까. 매정하게 내칠 땐 언제고 왜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돌려세울까.
아마도, 나의 파리는 내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누군가의 사랑을 듬뿍 받는 파리는 그래야만 파리니까. 파리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미행하고 있어’
우리는 오해하는 덕에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