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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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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간에서 진행되는 극은 그 공간이 좁을수록, 사건이 극적일수록 이야기의 밀도도 빈틈없이 탄탄해진다. 스릴러도, 코미디도, 심지어 잔잔한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축구 경기를 보러 간 네 남편들 대신,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편으로 남장하는 아내들의 이야기를 다룬 코미디 연극 <꽃의 비밀>도 그렇다.


<꽃의 비밀>은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라진 남편들을 찾기 위해 아내들이 부르노 계곡에 찾아가는 장면, 보험공단 소속 의사 카를로와 간호사 산드라가 빌라 페로사 마을로 찾아가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엔 네 여자들의 맏언니 소피아 집 거실에서 거의 모든 ‘핵심사건’들이 벌어진다.


호탕하고 유쾌한 왕언니 소피아, 늘 술에 취해 있지만 맞는 말만 하며 웃음 주는 자스민, 타고난 미모로 연기까지 했었고 평범한 주부인 지금도 잘 나가는 모니카, 공대를 수석 졸업한 인재로 머리 좋고 손재주도 좋은 지나까지. 한때 꿈도 꿨었고, 공부도 할 만큼 한 개성 강한 네 여자들은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농부로서 이탈리아 농촌 마을에 살고 있다.


지나는 하루 종일 땡볕 아래서 농사짓고, 가족들을 위해 집안일을 하고, 그러다 지쳐 겨우 잠든 밤엔 남편의 일방적인 욕구까지 받아줘야 되는 삶을 산다. 다른 세 여자들의 일상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남편이고, 가족이고, 아이들의 아버지라 ‘나’를 버린 채 견뎠을 것이다. 인내와 헌신을 배신이란 결과물로 되돌려 받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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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장진이 극작‧연출한 코미디 연극 <꽃의 비밀>이 2025년 2월 8일, 서울 대학로 링크아트센터에서 막이 올랐다. 5월 11일에 막을 내리는 극은 2015년 초연 당시 90%라는 객석 점유율을 기록하며 사랑받았다. 10년 동안 여러 시즌에 걸쳐 재공연 된 것은 물론 중국, 일본 등 해외까지 수출된 대한민국 코미디 연극의 스테디셀러이다. 2025년 <꽃의 비밀>은 소피아 역에 박선옥, 황정민, 정영주, 자스민 역에 장영남, 이엘, 조연진, 모니카 역에 이연희, 안소희, 공승연, 지나 역에 김슬기, 박지예, 카를로 역에 조재윤, 김대령, 최영준, 산드라 역에 정서우, 전윤민이 캐스팅됐다.


영화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웰컴 투 동막골> 등으로 대중성은 물론,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장진 감독은 연극계에서도 이름난 거물이다. 초기작이자 대표작 <서툰 사람들>, <택시 드리벌>뿐 아니라 <꽃의 비밀>, <얼음> 등 코미디부터 스릴러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꽃의 비밀>은 ‘장진식 코미디’ 색깔이 뚜렷하게 묻어나는 수작이다. 개성 뚜렷한 캐릭터들, 끊임없이 허를 찌르는 의외성과 반전들, 코미디 장르에 충실하게 웃음 또한 확실히 보장됐다. 그렇지만 가볍게 웃기만 할 작품은 아니다. 겉으론 코미디를 표방하는 극이지만 여성 인권과 결혼 후 경력단절, 가정폭력, 외도, 성매매, 혼외자, 농민들의 삶, 보험사기 및 살인미수까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소재들로 꽉 찬 연극이기도 하다. 쿨한 코미디가 아닌, 한바탕 실컷 웃고 나면 밀려오는 씁쓸함. 뒷맛이 쓰디쓴 블랙코미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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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등장부터 모종의 이유로 위축된 지나를 제외하곤, 소피아, 자스민, 모니카 모두 겉으론 밝게만 보인다. 하지만 털털한 왕언니 소피아는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려왔고, 늘 술에 취해 남편 이름조차 계속 까먹는 자스민은 남편이 데려온 혼외자를 키워냈지만 엄마 취급도 받지 못했다. (이걸 알면 남편 이름을 자꾸 잊는 게 그녀의 방어 기제처럼 보인다.)

 

어릴 땐 무대에서 연기를 했고(비록 남장을 했을지라도), 지금도 한참 어린 20대 초반 배달부에게 고백 받을 만큼 여전히 예쁜 모니카는 남편이 바람둥이란 걸 마을에서 자신만 몰랐다. 지나 또한 공대를 수석 졸업한 인재임에도 농사만 짓다가, 남편의 성매매와 외도를 알고 나선 폭발 직전이다.


축구를 보러간다며 외출한 남편들이 실은 환락가로 가고 있었고, 그들이 탄 차가 때마침(?) 계곡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편들은 살 가망이 없어 보이고, 남편들이 가입한 농민 보험 추가 신체검사가 내일이다.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일부 신체검사만 완벽하게 해내면 거액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소피아, 자스민, 모니카, 지나의 선택은 하나뿐이다. 남장. 남장 연기를 했던 모니카에게 연기 지도도 받을 수 있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다.


실제로 막이 나뉘진 않지만, 아내들이 남편으로 남장하는 것을 기점으로 극의 1막과 2막이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부터 남자가 된다’는 다짐 하에, 남자를 연기하는 그녀들을 보고 있으면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남자 연기를 연습하는 과정, ‘꽃의 비밀’을 모르는 보험공단 의사 카를로와 간호사 산드라를 속이려는 장면들 또한 코미디의 정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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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론 괜찮아 보이지만 아픈 사연을 간직한 농촌 여자들의 삶을 포장 없이 보여줬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적 시도가 보인다. 남편들이 탄 차가 계곡으로 추락한 것,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장하는 것 또한 아내들의 주체적 선택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네 여자들이 모두 남편들의 다양한 폭력(실제 폭력, 외도, 성매매 등)에 노출돼 있어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며 공감하는 것, 힘을 합쳐 상황을 타개해보려는 것 또한 여성 연대적인 모습이다.


그렇지만 같은 여성임에도 간호사 산드라는 ‘지나치게 섹시해 남자들의 음흉한 시선을 받는 게 익숙한 여자’로 소모되는 것, 의사 카를로의 성 정체성을 묘하게 비하하며 소비하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코미디는 웃음을 주는 게 가장 큰 목표이고, 공연 시간 또한 한계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는 것 또한 뒷맛이 씁쓸한 이유 중 하나이다.


소피아, 자스민, 모니카, 지나가 엔딩 후에 어떤 삶을 살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래도 한편으론 그녀들의 삶이 달라질 거란 희망도 보인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장하며 ‘꽃의 비밀’을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네 여자들끼리도 서로 감추고 있던 ‘꽃의 비밀’을 공유하고 연대했다는 것. 변화와 성장이란 꽃을 피워낼 씨앗을 뿌렸다는 것이다. 작은 농촌 마을, 그보다 더 작은 가정, 집이란 하나의 공간에서 소피아, 자스민, 모니카, 지나가 자신들이 주체가 되는 ‘핵심사건’을 만들어나가길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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