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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보이 앤 더 월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얼굴은 달처럼 동그랗고 눈동자는 검으며 수줍은 연지곤지를 두 볼에 찍은 아이가 있다. 아이는 집 근처의 숲속 친구들과 함께 뛰어논다. 그러다 구름 위를 걸어 올라간 아이는 푹신한 솜이불 같은 구름 위에서 숲을 내려다본다. 그때 저 멀리 뱃고동 소리와 쇳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먹구름 같은 검은 연기가 아이에게로 점점 다가오더니 이내 사라진다.
영화 <보이 앤 더 월드>는 동화책 같은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화려한 색감이 눈에 띄는 애니메이션 영화다. 브라질 알레 아브레우 감독의 작품으로, 귀여운 그림체지만 심도 있는 주제가 담겨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문명화된 사회의 대량생산과 고철 덩어리들의 행진, 빈부격차, 도시의 우울 등을 담아내고 있는 <보이 앤 더 월드>. 이 영화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도시로 떠난 아빠를 찾기 위한 아이의 여정이다.
영화는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더 월드’를 그려내며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 브라질의 역사와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은 그저 한 국가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우리 주변을 비롯한 전 세계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결말에는 반전이 있어 끝까지 주의 깊게 시청해야 하는 이 영화를 보며 인상 깊었던 몇 가지 포인트를 얘기해보고 싶다.
패턴화된 우울한 도시
아이는 아빠를 찾기 위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거센 바람에 의해 이상한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후 아이는 한 노인의 집에서 눈을 뜬다. 그곳은 주황색 벽지가 있고 따뜻한 차가 몸을 녹이는 곳이다. 또, 아이와 똑같은 무늬의 티셔츠를 입은 노인이 기침하는 소리와 강아지가 활기차게 짖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이기도 하다.
노인은 일터인 목화 재배 농장으로 향하고 아이는 노인을 따라간다. 그곳은 모두 일정한 속도로 같은 동작을 하고 있어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마치 패턴 그림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이처럼 영화는 패턴화된 도시의 모습 자체를 패턴 그림처럼 보이도록 연출한 점이 굉장히 독특하다. 모두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오와 열을 맞춰 행진하는 군대,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처럼 단일화된 그림의 대량생산 식품 등. 이질적인 이 패턴들은 마치 자의도 자유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을 마친 뒤 목화농장 주인은 노동자들을 일렬로 세운다. 필요 없는 인력을 골라내기 위함이다. 결국 키가 작고 병든 노인은 쫓겨나고 농장에는 키가 큰 젊은이들로 단일화되는 모습이다. 쫓겨난 노인은 어디로 향할까. 그 도착지는 모르겠으나 노인은 리어카를 끌고 어딘가로 떠난다. 도중 아이는 아빠가 트럭에 실려 가는 것을 발견하고 그 트럭을 뒤쫓는다.
도착한 곳은 공장으로, 공장 노동자들이 자동화 기계처럼 목화를 옮기고, 실을 뽑고, 면직물을 만드는 곳이다. 사이렌이 울리면 노동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옴짝달싹할 수 없는 버스에 몸을 실어 퇴근한다. 이때 아이는 무지갯빛 털모자를 쓴 한 청년을 뒤따라간다.
그 청년의 퇴근길은 무척 고되고 우울하다. 청년과 아이는 끝도 없이 이어진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만 집에 갈 수 있다. 그 속도도 굉장히 더뎌 보는 이까지 힘이 빠지는 듯하다. 지치고 외로운 하루의 끝을 달래기 위해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TV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지쳐 잠드는 두 사람의 모습. 어딘가 하루에 지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음악과 색: 때론 고통이, 때론 희망이
아이는 아빠의 피리 소리와 엄마의 노래를 좋아한다. 아이의 눈에는 노랫소리가 색 방울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이는 피리 소리와 노랫소리 방울을 고철 통 안에 담은 뒤 바닥에 묻어둔다. 이처럼 아이에게 있어 이 소리 방울은 행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이는 도시의 화려한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축구 경기와 불꽃축제보다 길거리와 언덕에서 가면을 쓴 이들이 모여 부르는 흥겨운 노래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하늘에 무수한 색 방울을 수놓고 그 광경 속에서 아이는 즐거워한다.
브라질의 삼바는 목화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노동의 고통을 잊기 위해 고향의 가락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던 것이 발전해 삼바가 된 것이다. 이처럼 가면 연주자들은 어쩌면 그들의 고통을 노래와 연주로 풀어내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공장 노동자인 청년 또한 가면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공장에 자동화 기계가 들어서고 인력이 필요 없어지자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이후 사람들은 가면과 형형색색의 옷을 두른 채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한다. 마치 노동자들의 저항과도 같은 다채로운 행렬. 그 노랫소리가 무수한 방울이 되어 커다란 불사조의 모습이 된다.
하지만 반대편에는 군대가 무장한 채 서 있다. 군악대의 소리와 무기의 소음들이 검은 방울을 만들어내고 이내 그 방울은 검은 독수리가 된다. 하늘에서는 음악대의 새와 군대의 새가 서로 싸운다. 군대는 대포와 총 등 온갖 무기를 동원해 그들을 탄압한다. 결국 새는 추락하고, 거리에는 악기만이 덩그러니 남아있게 된다.
도망치듯 왔던 길을 돌아가는 아이. 영화의 결말에서 사실 아이가 만난 노인과 청년은 아이의 미래 모습임이 드러난다. 아이는 자라 가면의 연주자이자 공장 노동자인 청년이 되고, 또 자라 목화를 재배하는 노인이 된다.
농장에서 잘린 노인은 집, 그러니까 진정한 어린 시절의 행복한 집으로 향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곳은 폐가처럼 변해있었지만, 다시 색과 노래, 희망이 가득한 곳이 된다. 그도 그럴 게 그곳은 아이들의 연주와 함께 소리 방울이 모여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새가 아주 작지만 힘차게 하늘을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만난 세상은 지치고 불안한 곳이었다. 순수함을 지닌 아이 또한 어른이 되어 자본주의 도시에서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는 자신만의 패턴을 계속 두르고 있었다. 노인과 아이는 흰 바탕에 빨간 스프라이트 무늬의 티셔츠를, 청년은 무지갯빛의 털모자를 말이다.
깡통 모자를 쓰던 노인은 결말에서야 무지갯빛 털모자를 다시 쓴다. 그리고 노인은 자신이 묻어둔 고철 통을 꺼내 귀에 대본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듯한 엄마 아빠의 노랫소리. 쳇바퀴 같은 생활 속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우리만의 색과 패턴은 무엇일까. 그리고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지만, 생각의 방울들로 하늘을 수놓아보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