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 줄 요약’이 쉬운 영화를 한 편 봤다. 영화 <메모리>(Memory, 2025)는 깊은 트라우마를 가진 ‘실비아’와 조기 치매를 앓는 ‘사울’이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누구와 누가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다’만큼 무책임한 요약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랑은 그 시작도 과정도 결말도 너무나 다양하다. 실비아와 사울의 사랑 이야기는 대체 어떤 사랑 이야기인가.
이 사랑의 시작
제목이 왜 ‘메모리’, 기억인지 궁금했다. 영화를 보면서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영화 소개에는 ‘잊지 못하는 여자’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그러니까 과거에 갇힌 여자와 현재만 살 수 있는 남자라는 구도를 잡은 것 같던데 별로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실비아에 관한 설명은 나쁘지 않지만, 사울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 현재만 사는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조기 치매를 앓는 바람에 기억을 잃어가고 있긴 하다만 그가 잊는 것은 발병 이후의 기억이다. 그것들은 현재에 가까운 기억이지, 과거의 기억이라고 하기는 애매하다. 사울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지금은 세상을 떠난 전 부인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다. 또한 영화 속에서 주로 보는 그의 증세는 섬망에 가깝다. 우리가 흔히들 ‘기억을 잃어가는’ 인물을 상상할 때 떠올리는 모습, 한참 관계를 쌓아가다가 갑자기 ‘누구세요?’를 시전하는 장면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사울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현재만 사는 남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울도 실비아처럼 과거에 매인 사람이지 않은가. 발병 이후의 기억은 자꾸만 흐려지지만, 그 이전의 과거는 선명하다.
이렇게 해석할 때 실비아와 사울은, 과거를 잊지 못하고 과거에 갇힌 여자, 그리고 과거’만’ 잊지 못하고 과거에 갇힌 남자다. 둘 모두 과거에 갇혀 과거를 산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고교 동창회인 이유도 이것이 아닐까 싶다. 둘의 사랑은 과거에 갇힌 채 시작한다.
이 사랑의 과정
과거라는 감옥이 있다고 할 때, 그 탈출을 돕는 것이 감옥 외부의 협력자가 아니라 또 다른 재소자라는 점이 재밌다. 심지어 그 둘은 같은 방에 갇힌 것도 아니고 다른 방에서 살던 각각의 독방 수감자.
나는 원래 로맨스 장르를 선호하지 않는다. 갑자기 두 주인공이 왜 사랑에 빠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볼 때만큼은 이 의문이 생기지 않았다. 그 둘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사건, 강렬한 이유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영화를 볼 때는 이 둘이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로맨스 영화에 의문점이 많은 나로서는 드문 경험이다.
굳이 논리적인 이유를 찾아보자면, 둘 다 과거에 갇힌 사람이라서, 그래서 서로의 과거에도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비아와 사울은 보호라는 명목 아래 지나간 일은 묻어두고 어서 지금으로 넘어오기를 재촉하는 각자의 가족들 속에 살았다. 하지만 매듭이 풀리지 않은 과거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 존재감만 더 커질 뿐.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하는 매듭에 낀 채로 길을 잃어가던 중, 서로의 과거를 기꺼이 들을 수 있는 두 사람이 만난다. 이 만남이 과거의 매듭을 슬근슬근 풀어낸다. 두 사람이 상대의 매듭을 서로 풀어주었다는 뜻은 아니다. 각자의 매듭은 각자가 푼다. 하지만 상대가 그것을 지켜봐 준다. 상대의 시선과 귀 기울임에 힘입어 실비아와 사울은 자신의 매듭을 풀고 과거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는다. 둘의 사랑은 서로의 과거에 귀 기울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 사랑의 결말
아무리 그래도 오롯이 재소자 둘만의 힘으로 탈출까지 해내기는 버거운지, 영화에는 둘의 외부 협력자 한 명이 등장한다. 바로 실비아의 딸, ‘애나’.
실비아와 사울의 ‘쌍방 구원 서사’처럼 보이는 영화임에도, 이 영화에 영웅이 한 명 있다면 그건 애나라고 생각한다. 그는 실비아의 가장 큰 지지자, 어쩌면 유일한 지지자이다. 각자의 매듭을 다 풀어가면서도 서로의 손을 잡으러 가기는 망설이는 두 사람의 만남을 성사하는 것도 애나다.
엔딩 장면을 보면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2024), 또는 <나의 올드 오크>(The Old Oak, 2024)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물론 두 영화는 사회적 약자의 손을 잡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메모리>의 애나 또한 각자의 탈출구를 찾아놓고선 독방 밖으로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던 두 사람을 잡고 이끈다.
아이다움과 어른스러움을 모두 갖고 있는 애나를 보고 있으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어린이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불편함이 그나마 덜하다. 실비아와 사울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애나 또한 손을 단단히 잡을 사람이 둘 더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웅은 남을 구하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대신, 자신도 구한다. 그래서 이 성숙한 어린 영웅이 기특하고 또 기특하다.
영화 <메모리>는 깊은 트라우마를 가진 실비아와 조기 치매를 앓는 사울이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다. 어떤 사랑 이야기냐면, 과거에 갇힌 채 시작해, 서로의 과거에 귀 기울이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서로의 손과 또 다른 소중한 손을 잡을 수 있게 되는, 그런 사랑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