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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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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오피니언에는

연극 <흑백다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극 <흑백다방>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배경으로, 세월이 흘러 다시 마주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폭력의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온전히 사과할 수 있을까?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의 대립을 통해 작품은 용서와 화해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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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다방>은 2014년 초연 이후 전국, 그리고 해외에서도 그 시대, 지역에 맞춰 공연되었다. 필자는 이 작품을 작년 10주년 기념 ‘흑백다방 페스티벌’에서 오세혁 연출의 젠더프리 버전으로, 그리고 <흑백다방 in 1991> 낭독 공연 버전으로 만나보았다.


다방의 주인이자 과거 학생들을 가르쳤던 교수는 사람의 마음을 잘 꿰뚫어 보며, 그 능력으로 손님들을 상담해 주며 살아간다. 그런 교수에게는 죽은 오빠가 있다. 오빠의 기일, 한 손님이 다방을 찾아오며 극은 시작된다.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손님은 사실 교수로 인해 청력을 잃게 된 피해자이다. 교수의 오빠가 그 당시 손님을 때린 경찰이었고, 교수는 손님의 도움 요청과 신뢰를 방관했다. 그날의 기억은 청력의 상실뿐만 아니라 손님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극은 내내 흑과 백과 같은 대립적 구도를 보여준다. 블랙커피와 흰 설탕, 상담자와 내담자,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 이 구도는 계속해서 뒤바뀐다. 피해자였던 손님이 주인에게 칼을 겨누기도 하며, 다시 손님이 청력을 잃었을 때의 상황이 재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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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 전에는 원래 다방 주인이 손님을 폭행한 경찰이었으나, 젠더프리 버전의 <흑백다방>에서는 주인이 2차 가해자로 바뀐다. 직접적 피해자와 2차 가해자의 구도에서 장켈레비치와 데리다가 말했던 용서 불가능성이 떠오른다.

 

장켈레비치는 조건적 용서에 대해, 직접적인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가해자가 사과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직접적 가해자인 오빠는 죽었다. 즉, 손님은 용서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손님의 상처는 그 어떤 사과로도 돌이킬 수 없다. 직접적 가해자인 경찰은 이미 죽었으며, 손님의 청력은 어떻게 해서도 되돌릴 수 없다.


더 이상의 용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다방에서는 끊임없이 폭력의 교환이 일어난다. 손님은 칼, 그리고 ’자신을 죽여야 할 명분’인 유골을 꺼내놓으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제발 치유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다방 주인은 결국 칼을 내려놓으며 ’다방은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는 곳‘이라 말한다. 오늘 이곳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을 거라고.

 

처음으로 두 사람 사이 계속되던 폭력의 교환이 멈춘다. 드디어 소통의 길이 트인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진정한 사과가 이뤄질 수 있을까?

 

데리다는 ‘진정한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즉 용서란 단순히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수행적인 과정이다. 홀로코스트를 예로 들면, 직접적 가해자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으나 독일의 수상은 매년 끊임없이 사과와 용서를 구한다. 용서는 단순한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수행적인 과정이다.

 

용서는 화해를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시도되는 것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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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다방>에서 두 사람의 화해의 시작에는 ‘신뢰‘가 있었다.

 

공연을 보는 동안 손님은 물론, 관객들은 다방 주인의 진술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이는 손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관객들 역시 손님과 마찬가지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조차 신뢰할 수 없는 불신과 거짓말로 가득 찬 상황에서, 손님과 다방 주인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믿어보기로 한다.


계속되는 불신과 신뢰, 관계의 전복, 찻잔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과정 끝에 다방은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공간으로 바뀐다. 서로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믿을 준비가 되었을 때 극장에는 노고지리의 노래 <찻잔>이 분명하게 울려 퍼진다.


연극은 두 사람이 다시 찻잔을 채우고 마주 보는 모습으로 끝난다.

 

그 뒤에 어떤 대화가 이어졌을지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다. 용서와 화해를 위한 두 사람의 대화가 아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그런 결말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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