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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과 과학 기술의 결합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까?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내가 물에서 본 것>이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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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안무가는 이번 작품이 지난 3년간 자신이 경험한 보조생식기술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2022년 한국의 신생아 10명 중 1명은 시험관 시술을 통해 태어났을 정도로, 보조생식기술은 한국 사회에서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보조생식기술에 대한 서사는 여전히 구식으로, 여전히 여성의 몸을 재생산의 도구로 재단하고 그 과정을 ‘성공’과 ‘실패’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서사 속에서 주체인 여성의 몸은 모순적으로 소외되고 만다. 일련의 경험 속에서 여성은 결국 ‘몸은 무엇인가?’라는 포스트휴머니즘적, 존재론적 질문으로 종착하게 된다.

 

무대에 무용수들이 하나둘씩 등장해 경사진 스테인리스 무대 위의 파란 비닐을 벗기기 시작한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비닐 위에서 다리를 끌고, 팔을 끌면서 끼익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점점 파란 비닐을 벗기자, 무용수들의 몸이 바닥에 그대로 비친다. 그리고 거울 같아 보이던 무대는 무용수들이 자신의 몸을 바닥에 문지르고, 서로의 몸을 얽어 밀고 당기고, 무대의 끝에서 끝까지 뛰어다니며 점점 몸의 흔적으로 뒤덮인다.

 

어느 순간 무용수들이 한두 명씩 무대 뒤에서 입에 물을 머금고 돌아와 일렬로 서서 물을 뱉고 흘린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물 자국만이 남아있다. 또다시 몇몇 무용수들이 계란을 이고 들어와 무대에 계란을 한 알씩 굴려놓는다. 그리고 한 무용수가 계란 사이를 위태롭게 걸어 다니며 춤을 추다가, 계란을 하나씩 공중에 던지기 시작한다. 몸의 흔적으로 가득한 바닥은 점점 계란 파편으로 뒤덮인다.

 

이 움직임과 함께 하는 소리는 무용수와 함께 춤을 추는 또 다른 행위자였다. 어떤 소리라고 명명할 수 없을 정도로 피아노 소리, 연습 중 녹음한 무용수의 발걸음 소리, 목소리, CT나 MRI 촬영에서 들리는 소리가 모두 혼합되어 있다. 그렇게 탄생한 낯선 소리는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소리지만 결국 낯선 소리가 되어 '몸'이라는 행위에 집중하게 만드는 또 다른 행위자의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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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든 난해한 행위가 끝난 후에 남은 것은 몸의 흔적과 계란 파편, 물 자국으로 가득한 무대였다. 무대는 마치 관객들에게 물질적으로 관계 맺는 몸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것만 같았다. 왜 여성의 몸은 과학기술과 결합할 때 사회적, 과학기술학적, 문화적으로 소외당하고,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나? 이는 결국 과학기술이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19세기 후반까지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동안 여성은 불평등한 교육과 고용으로 인해 주변화되었고, 그사이에 공학이라는 개념은 계급, 인종, 젠더 경계선을 통해 구분 지어졌다. 그러니 여성은 과학기술의 설계자로서도, 소비자로서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러한 여성과 기술의 만남을 연구한 주디 와이즈먼은 ‘분리’를 파괴할 것을 주장하며 설계자와 사용자, 기술의 생산과 소비,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분리를 파괴하고 해체하려 했다.

 

이렇게 파괴되고 해체된 과학기술과 몸 사이에서 우리는 곧 ‘우리의 몸을 과연 기술로 대체할 수 있을까?’와 같이 또 다른 몸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들여다보며 취약성을 인식하고 그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 후에야 우리는 몸에 대한 포스트휴머니즘적인 담론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공연은 이러한 지점에 잠시 멈춰 몸의 취약성을 인지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취약성을 인지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취약성을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몸을 움직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의지를 주는 것만 같았다.

 

공연 뒤에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때 한 관객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불쾌한 공연은 처음이고, 다시 이 공연을 볼 것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공연을 무대에 올린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을 듣자마자, ‘아, 이게 이 공연을 무대로 올린 이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보라 안무가의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시술 현장에서의 사건들은 개인적인 경험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경험에서 비롯된 모든 질문은 개인적이지 않다 못해 지극히 공적인 담론이다. 인간의 반인 여성이라면 누구나 노출될 수 있는 과학 기술과 몸에 대한 고민이 어떻게 개인적이겠는가? 다만 이 경험의 주체가 가부장제 사회의 '타자'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이 경험은 사적이고 불쾌한 경험으로 다뤄졌다. 그러므로 <내가 물에서 본 것>을 물의를 빚는(mattering) 존재론적 안무라고 인식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공연의 성취를 이룬 것이다. 나는 다시 이 공연을 볼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다. 앞으로도 이런 공연을 무대에서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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