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빙의 소재를 살짝 정리해보았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최근 몇 년간 크게 유행했고, 그 유행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회, 빙, 환” 소재에 대해 다뤄볼까 한다. “회, 빙, 환”은 “회귀”, “빙의”, “환생”을 묶어서 부르는 말로 대부분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전개방식을 담당한다.
처음 이런 소재가 등장했을 때는, 굉장히 신선했다. 이미 소설로 모든 결말까지 다 읽어서 내용을 다 아는 채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설정도, 그래서 현실에서는 몹시 평범했던 사람이 소설 속에 빙의해서는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내용도 신선하였다. 회귀, 환생 소재도 마찬가지로, 부단히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던 불쌍한 주인공이 덧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죽음을 받아들인 후 다시 돌아와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나 자신을 무시한 사람에게 복수해 독자로 하여금 시원한 사이다를 안겨주는 내용이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빙의” 소재는 굉장한 인기를 끌었는데, 이유는 독자에게 제공할 새로운 흥미 요소들이 무궁무진하게 많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회귀는 한 인물의 인생이 바뀌는 것 말고는 크게 인물 변화가 없는 소재이고, 환생은 다시 태어났고 그것을 남자주인공이 알아보고 운명적인 사랑을 유지한다는 것 외에는 별 게 없는 소재이다. 반면, 빙의 소재는 누구에게 빙의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었다. 심지어, 요즘은 “내가 읽은 판타지 소설이 너무 많아서, 내가 무슨 소설에 빙의했는지도 모르겠어!”라는 느낌으로 빙의한 사람도 등장하는 판국이다.
당시 이러한 소재의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이게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인가 싶었다.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트럭에 치였다고 새로운 세상으로 가서 굉장히 평범했던 주인공이 특별 취급받는다는 내용이 굉장히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소설 속 주인공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나처럼 평범한 주인공이 나는 갈 수도 없는 새로운 세상에 가서 고작 소설 내용을 다 안다는 이유 하나로 마음껏 사랑받고 능력을 펼친다는 게 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으니까, 이러한 소재가 유행하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이유는 “사람들이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해서, 대리만족을 찾는구나.”였다. 서점에 꽂혀있는 문학 서적, 청소년동화도 현대의 삶을 반영하지만, 나는 책이 삶을 반영하는 데에는 시간차가 있다고 본다. 가장 유행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시장은 실시간으로 연재나 방송이 가능한 공간이기에 소설 쪽에서는 역시 웹 소설이 그러한 유행에 민감한 장소라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현재 자신이 사는 삶의 끝이 행복한 마무리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마무리인지 전혀 모른다. 잘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 세상이라, 꼭 내가 사회에 필요한 존재인지 확인도 받기 어렵다. 그러나 소설 속에 빙의한 주인공은 다르다. 그는 소설 속 모든 현명하다는 인물이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고, 그 이유로 많은 사람을 위험에서 구해 사랑받는다. 그런 모습에서 어쩌면 우리는 현실 속 자신과 같지만, 특별취급 받는 그의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내 생각이 앞서 간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관련 영상을 하나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누군가는 그냥 재미있자고 보는 소설로 무슨 현대 상황을 분석하느냐고 할 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소설에 너무 진지하게 접근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재가 사골국 우려먹듯 오래된 소재라는 건, 어느 정도의 주류장르로 굳혀졌다는 것이고 이는 곧 그것이 사회의 흐름을 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충분히 지금 시장에 유통되는 판타지 소설도 재밌지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너무 주인공이 돋보이는 소설은 조금 지양해줬으면 한다는 점이다. 한 사회의 엘리트가 아닌 소시민인 나는 그렇게 여자주인공이 너무 완벽한 작품을 보면, 작품 속 조연에 감정이입해 씁쓸해지면서 ‘그래. 소설이나 현실이나 빛나는 사람만 빛나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빛나는 소설도 좋지만, 그냥 모든 인물이 빛나는 작품도 만나고 싶다. 현실에서는 다들 말만 그렇게 하고 아무도 행동과 눈에 보이는 결과로 보여준 적이 없는 것을, 소설이나 작품에서는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판타지의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