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무도 모르게 으스러진 삶들 - 도서 해방자들

글 입력 2024.09.0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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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봄이 채 오기도 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횟집과 주유소를 지난 적이 있다. 주유소에는 ‘이곳을 지나면 다른 주유소는 없습니다’라는 팻말이 걸려있었고 횟집 간판에는 자랑스럽게 ‘최북단 횟집’이라 적혀 있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군용 차량의 실물을 처음 보았던 곳, 고성. 고성군의 면적은 정말 넓은데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그 드넓은 땅을 두고 우리는 남쪽 일부에 대해서만 행정권을 갖고 있으므로. 고성군의 북쪽은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은 갈 수 없을 것만 같다.

통일 전망대에 가보려 했으나 안전 교육 수강 및 방문 차량 등록까지 마쳐야 하는 터라 포기했다. 서울에서 수강했던 안전 교육이라곤 해봤자 소방안전 혹은 교통안전 교육이 전부였는데, 차로 4시간 떨어진 곳에선 보안 교육을 들으라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총과 가까운 삶을 살도록 만들었나. 전쟁과 분단 이야기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 같은데. 그래서 고은지의 데뷔작 <해방자들>에서 엠넷 뮤직, 조성모와 세월호가 언급된 쪽에서는 잠시간 눈알을 굴렸다. 토막마다 연도가 쓰여있긴 하지만 소재가 시간적으로 멀게 느껴진 탓이었다. 이게 이렇게 가까운 이야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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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내용은 요한부터 시작해 인숙, 헨리 그리고 하루의 탄생까지 4세대를 다룬다. 디아스포라 문학이라지만 이념 간의 충돌, 고부 갈등,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상실까지 담고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쓰였을까 싶을 정도로 역사적 사건과 각 인물의 삶에 대한 표현이 세밀하고 철저하다. 거시적으로는 물론 미시적인 시점까지 작가의 통찰력이 어마어마하다고 느껴지는 문장들이 많다. 비슷한 세대의 해외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서사라기엔 시간적 범위가 넓어 읽는 동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땅굴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 영원한 어둠 속에서 살고 싶은 충동이 이해가 갔다. 숨고 싶기도 하고 들키고 싶기도 한 어린애들이 노는 것처럼. 땅굴로 들어가는 건 언젠가 발견되기 위해서다. 간첩이 되는 건 언젠가 살아서 발각되기 위해서다. (P.29)
 
우리는 못되게 구는 게 잘해주는 거야. 그게 친하게 지내는 방법이지.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거든. (P.150)

“도덕적 권위가 높은 사람들은 위험해.” 제니가 내 귀에 대호 말했다. 그 말들은 마술사의 모자에서 흘러나오는 비단 같았다. “그 사람들 자아는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보는 능력에 의지하고 있거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자마자 독재자가 돼.” (P.181)
 
 
이 소설은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을 수많은 이들의 짧은 역사 그 자체다. 토막마다 특정 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위주로 묘사하고 있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삶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 땅에 이름 하나 새기지 못하고 죽어 간 숱한 이들의 이야기이므로. 구시대적 가장, 연애 시절과는 달리 지난한 결혼 생활을 버텼을 부부, 혹은 아들에 대한 애정과 며느리에 대한 애증 사이의 간극을 쉽게 극복하지 못해 서툴게 표현하기만 했을 시어머니와 직접 겪지 못해 알지 못하는 세계와 현실 간의 연관성을 실감하지 못하는 한인 2세대가 제하, 인숙과 성호, 후란, 그리고 헨리라는 이름으로 투영되어 있을 뿐이다. 실재하는 개개인의 서사와 다름없다.

책을 읽을 때 인물의 삶과 감정에 치중하는 편인 나로서는 마지막 장을 덮은 뒤로도 잠시간은 헤어 나오지 못했다. 죄가 없어도 타인의 총질 한 번이면 눈 깜짝할 새 꺾이는 게 사람 목숨임은 잘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공포감만 갖고 있을 뿐 그저 전쟁과 총은 타인의 과거 같기만 한 탓이다. 그리고 그런 누군가의 과거를 엿본 듯한 기분이고. 그래서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닌 것만 같고.

  
항복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생전에 전쟁을 보실 일이 없었으니까. (P.15)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를 지금의 한국, 여러 국가 간 작용하는 권력과 그로 인해 묵살된 국민들의 죽음과 훼손된 생生, 그리고 지금도 파괴되고 있을 약자들의 삶 등의 것과 사실적으로 연관 지어 반추할 필요가 있겠으나 개인으로서 어떤 유효한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해 허탈하다. 과연 우리는 무엇에서 해방되었나.

  
그렇지만 숱한 페이지에 걸친 글 대신, 로버트의 가방 안에는 장전된 총이 있었다. (P.229)
 
 
소설 후반부는 로버트와 제니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무력이 아닌 말과 글로 맞서려던 로버트는 결국 부산 어느 강연장에 글이 아닌 총과 함께 입장하고 만다. 독자는 지금의 현실을 근거로 로버트의 총구가 어디를 향할지 일간 유추할 수 있지만, 평화로운 방식을 고집하던 그의 결말이라기엔 실로 허탈하다. 끝에 이르러 로버트와 제니의 선택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속도감 있는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로버트가 집착했던 언어는 힘을 잃고, 물리적이자 정치적인 권력이 이기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권력 하에 잡힌 사회적 질서가 어떻게 또 국민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지도 과감하게 고발한다.

펜과 칼 중 무엇이 더 강한지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실질적으로는 생존을 위협하는 칼과 총이 막강하겠지만 정신적 측면으로는 펜도 만만찮게 영향력이 크다고 믿는다. 작가 고은지는 잘못된 총구의 방향과 그로 인한 상실, 또 그 절망을 극복해 내고 재기하는 풀뿌리 같은 삶을 로버트와 제니, 성호, 헨리와 여러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잘못 발사된 실탄들이 어떤 결과를 낳아 지금의 현실을 건축해 왔는지, 글의 끝에 총이 놓인 것이 어떤 미래를 만들었는지 글을 통해 폭로한다.

   
당연히 세상을 안 믿겠죠. 자기 자식들이 땅바닥에서 녹아갔으니 누구든 증오할 거고요. (P.93)

“우리 아빠는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 얘기를 하곤 하셨거든. 나는 그냥 아빠가 외로운 거 같다고 생각했어.” 헨리가 화면을 가리켰다. “그렇지만 그 반대였네. 아빠는 실제로 있는 곳을 얘기하셨나 봐. 아빠가 자란 고향 말이야.” (P.209)
 
 
다양하게 아픈 숱한 삶들이 한데 버무려진 이 소설이 더 널리 퍼지길 바란다. 매일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내지만, 타인의 고통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니까.

 

 

[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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