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이다는 맛있지만 폭력은 맛깔나지 않다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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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즐거움에 반기를 들다
그야말로 K-콘텐츠의 황금기다. 한국 제작자들이 만들고 한국 배우가 등장하는 콘텐츠가 이리도 사랑받은 시대는 역사상 처음이다. 작품은 국내를 휩쓸고 세계로 뻗어나가니 이제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Do you know OOO
?’라고 물어도 괜찮을 정도의 호황이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도 한국의 콘텐츠를 하나쯤은 알기 마련인 시대다. 콘텐츠 창작자들과 애호가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요즘이다. 그러나 콘텐츠의 바다를 헤엄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만치에 서서 시큰둥한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필자가 그중 하나이다. 필자는 드라마도 영화도 보지 않는다. 드라마는 아시아를 뒤흔들었던 10년 전 히트작이 마지막이고, 2년 전 개봉한 유명 감독의 로맨스 장편 이후로 영화에도 흥미를 잃었다. 넷플릭스나 왓챠와 같은 OTT 구독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고, GV나 시사회에도 관심이 없다. 기껏해야 좋아하는 것은 유튜브에서 영화 요약본을 보는 것인데, 그러한 영상도 10개 남짓이다. 심지어 모두 해외 콘텐츠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필자 같은 사람이 자리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함을 표한다. 장르도 다양하고 개수도 어마어마한 데다 세계적으로 상업성과 예술성을 인정받는 우리나라 콘텐츠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누군가는 속내로 ‘이상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렇지만 한국의 콘텐츠를 멀리하게 만드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폭력성 때문이다.
조직폭력배나 범죄자들이 등장하는 영화야 심각한 수준의 폭력이 눈을 강타할 수밖에 없다. 쉴 새 없이 폭력을 남발하는 장면의 폭발에 피로감을 느껴 애초에 그런 영화는 보지 않기에 굳이 끄집어내 조목조목 꼬집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기서 필자가 지적하는 폭력이란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반적인 벌이는 것을 일컫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누군가가 느닷없이 돌변하여 기이할 정도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하는 장면을 보면 누군가가 심장 한가운데로 정통 펀치를 갈긴 것처럼 불길한 불안감이 끓어오른다. 심지어 그러한 폭력이 문제 해결의 수단, 회심의 일격, 복수의 화룡점정을 점하며 통쾌함과 유쾌함을 주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광경은 더더욱 끔찍하다. 검은 화면을 밝히면 온갖 폭력의 향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이 마구 짓눌려서 결국 KO패를 당하고 만다.
한국의 콘텐츠만 유독 그러한 특징을 지닌다 단언할 수 없겠지만, 드라마와 영화로부터 필자를 멀어지게 만든 원인이 수많은 국내 콘텐츠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이번 이야기는 한국 콘텐츠를 기본값으로 설정하는 셈이 되겠다. 이제부터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흥미 요소로 사용되는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콘텐츠를 사랑하는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화두를 던져보고 싶다.
어른들도 사랑하는 폭력의 모양
한국 콘텐츠에 등장하는 폭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장면은 지난 2018년 방영하여 전국민적 사랑을 받은 드라마
에서 등장했다. 작품 속 한서진(염정아 분)이 이수임(이태란 분)과 말다툼을 벌이던 중,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자 감정이 격앙되어 내뱉은 “아갈머리를 확 찢어버릴라”라는 대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 대사는 많은 관객들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통쾌함을 주었고, 이내 작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사이자 밈이 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필자가 이 대사를 들었던 순간은 악몽과 비슷한 감각으로 남아있다. 그 상스러운 어감을 띤 문장이 여린 고막을 타고 뇌리에 치고 들어온 순간, 찌릿 섬광처럼 너무도 낯선 질감의 폭죽이 가슴을 터뜨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것이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드라마의 대사라는 점을 직시한 찰나에는 앞으로 온오프라인에서 펼쳐질 천박한 몇 수를 상상하게 되었다. 이미 존재하는 욕설의 범위도 감내하기 힘들 지경인데 그 이상의 세상도 존재한다니,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일상에서도 흔히 내뱉곤 하는 욕설을 그대로 박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욕설은 폭력의 일례에 불과하다. 화면 속에는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형태의 폭력이 존재한다. 욕설과 비속어는 기본이고 직접적인 상처를 남기는 물리적인 폭력과 혹은 그러한 의지를 표명하며 주먹을 들어 올리는 행동, 그리고 누군가를 심리적으로 궁지에 밀어 넣는 상황의 연속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폭력이 오로지 강자의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위의 한서진과 같이 위기에 처한 존재가 상대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폭력을 취하기도 한다. 갑질을 일삼는 손님을 향해 저속한 언어를 난사하거나, 불륜을 저지른 애인의 뺨을 내리치는 장면 등이 일례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의 폭력은 으레 ‘사이다’ 혹은 ‘참교육’과 같은 수식어로 묶이며 시청자로부터 더욱 큰 지지를 받는다.
매체 속 폭력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 범위를 점점 넓혀오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의 제재를 피하고자 대놓고 욕설을 갈기고 주먹질하는 대신, 그들은 편법과 우회를 통해 또 다른 양상의 폭력을 끌어들인다. 다음번에는 그들이 꾸려온 상상의 나래에서 또 어떤 참신한 폭력을 꺼내 올지 예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방통위의 규정이 그러한 비속어를 모두 감당할 수 없을뿐더러 그 폭력성의 정도를 지적하기 모호하여 제재되지 않았을 뿐, 그것이 지닌 파괴적 특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근사한 포장지를 두르면 시청자들은 격렬한 호응으로 답할지언정, 사리를 분별하여 핵심을 가려내는 이성은 잃어버리고 모호하고 확실한 분노만을 고조시키는 폭력의 특성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작품 내에서 은근한 기 싸움의 기미라도 보일라치면 필자의 심장은 두근거린다. 명분만 주어졌다면 바로 다음 순간에라도 누구나 팔을 들어 올리고 주먹을 쥐어박고 험한 말을 토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행이 되어 모두가 깔깔 웃어대는 사이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떨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묘하게 뒤틀린 입꼬리로 세상을 향해 웃고 있지만 그의 속내는 전혀 유쾌하지 않다.
사이다와 참교육이 지지받는 이유
정리해보면 작품 속에서 폭력은 인물을 보호하고 불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너그러이 용납되며 그 범위는 점점 넓어지는 추세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은 가짜라는 점만 다를 뿐 실제의 것과 다를 바 없는 참혹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피어오른다. 현실에서 자행되는 폭력의 경우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건 민감하게 주시하는 반면, 어째서 드라마와 작품 속에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재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용납될까? 사람들이 콘텐츠 속 폭력에 호의적인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심지어 그러한 장면이 ‘사이다 모음집’이라는 기괴한 타이틀로 열렬히 지지받는 것은 어째서일까?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악을 법으로 처벌하는 대신 폭력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질문의 해답은 콘텐츠가 지닌 가상의 공간이라는 특징에서 기인한다. 가상의 세계를 좇는 시청자들은 모두 현실에 속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머릿속은 천사나 유니콘의 뿔과 같은 가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을지언정, 실제로 두 발 붙이고 선 곳은 메마른 땅 위다.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다. 힐끗 선심 쓰듯 곁눈질 받는 엑스트라다. 재기도 불가할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구제하는 장치 따위는 없고, 언제고 곁에서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친구나 근사한 애인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대신 그들의 삶에는 불확실성이라는 운명만이 존재하고, 실패와 좌절, 분노와 모멸감이라는 독사들이 금방이라도 목을 물어버릴 수 있다는 듯 혀를 날름거리며 위협해 오곤 한다. 요컨대 우리를 겁주는 현실의 요소는 너무도 많으나 그것을 물리치고 상황을 단숨에 역전시키는 마법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작품 안의 세계도 일부 비슷한 점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도 현실의 암울한 요소는 존재한다. 현실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닮은 모양으로 빚어진 인물들이 비슷한 고통을 겪는 것을 화면 너머로 목격한다. 그들은 가상의 존재에 자신을 투영하고, 또 주변의 누군가를 빗대어 본다. 그들이 겪는 슬픔은 자신들이 직접 겪었던 상처를 다시금 일깨운다. 동시에 현실을 사는 동안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른다. 축축하게 젖은 슬픔과 분노, 증오, 수치심이 뱃속을 기어오른다.
이때 마법이라도 부린 듯 폭력이란 요술봉이 등장한다. 갑질을 당하던 인물이 찰진 비속어를 내뱉어 상대가 당황으로 얼어버린 것이다. 혹은 불륜을 저지른 애인의 뺨을 내리치자 정적이 감돈다. 순간적으로 시청자들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통쾌함을 느끼고 강렬한 해방감을 만끽하게 된다. 그것을 통해 현실에서 겪은 상처까지도 일부 치유받는다. 즉, 시청자는 자신이 실제로 겪은 슬픔을 스스로 떨쳐낸 작품 속 인물에게 자아를 의탁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상처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갑갑한 속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와 가상의 참교육이 큰 지지를 받는다.
현실에서는 시청자들이 차마 직시하지 못했던 감정들, 예컨대 불의를 용납하는 사회를 향한 분노와 그에 대한 무력감 및 수치심을 해소하고 싶은 바람에서 우러나온 감정이 가상의 폭력을 합리화한다. 이것은 오늘날 사적제재가 국민적 지지를 받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고, 결과적으로 폭력이 지닌 공격성이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준다는 모순을 지닌다. 그러므로 극적인 폭행과 상스러운 언어도 가상에서라면 용납이 된다. 마음의 통로를 단단히 가로막고 있던 상처를 뻥 뚫어버려 상쾌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현실의 정의와 법, 제도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나 개운하게 해치워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고 싶은 것
필자도 가끔은 마법과 같은 일을 꿈꾼다. 범죄자들을 끝까지 추적해 잡아내어 분명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고, 권력의 차이로 누군가를 낮추어보는 일 따위 없길 바라며 나를 상처준 인물은 똑같이 괴롭길 바란다. 가상의 폭력이 가져오는 통쾌함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큰 위로가 된다는 것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법의 테두리 내에서 폭력이라곤 일절 없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콘텐츠에 등장하는 폭력의 빈도가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였고 그 양상도 복잡다단한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다. 또한 폭력이 자극하는 쾌락은 너무도 강렬하여 빠르게 전파되고 쉬이 사람들을 매혹한다는 문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과도한 폭력의 등장이 작품 진행에 필연적이냐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와 같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이 가상의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극적인 폭력을 택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납득되지 않다 못해 기이하다. 의문은 점점 확장되어, 이제는 작품에 폭력을 끌어들인 저의에 의심을 품게 된다. 폭력을 통한 문제 해결이 가져오는 쾌락에 열광하는 시청자의 심리를 겨냥하여 단지 이슈몰이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닌가 고민한다. 작품 속 인물이 겪는 극단적인 고난, 그리고 사이다와 참교육 장면은 사실상 폭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인물의 선함과 불우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 반대 선상에 놓인 폭력을 가져와 충돌시킬 필요가 있을까. 간편한 가짜보다 고된 진실이야말로 창작자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음 세대의 작품에는 또 어떤 의미의 폭력이 담겨있을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으레 따라올 것으로 예상되는 질문들이 있다. 필자가 얼마나 비폭력적인 사람인지를 물어오는 질문들이다. 누군가는 “너는 화날 때 욕 안 하냐”, “누군가를 마구 때려서라도 풀어내고 싶은 만큼의 앙금을 품어본 적 없어서 하는 속 편한 소리”라 말할 수 있다. 시청률이 노동의 가치를 증명하는 창작자의 입장이 되어본 적 없어서 하는 뻔한 이야기라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노라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만 폭력의 사용이 작품의 흥행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건대 이러한 문제 제기는 필요하다. 너무도 많은 문제상황과 복잡한 감정들이 폭력을 통해 물 베듯 해결되고 상대는 무조건적인 악인이 되는 한편, 사이다 장면 이후는 무심히 건너뛰어 버리는 방식은 무책임하다. 이러한 전개는 불우한 상황과 극적인 갈등마저도 모두 폭력이라는 소재의 등장을 위해 준비된 소품에 불과하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준다. 결국 폭력이 지닌 무게와 작품의 파급력에 대한 무책임의 방증에 불과하다. 비록 가상의 세계일지언정 그것이 만들어져 세상에 전해졌을 때 야기되는 파급효과를 고려하면 폭력이라는 소재를 단순히 시청자들의 이목을 끄는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와 영화를 보지 않는 필자에게 보내오는 의문의 시선에 반하여 이러한 답문을 보내고 싶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불필요한 폭력은 거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분노와 증오를 아주 극적인 욕설과 폭행으로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작품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폭력 장면의 소비가 가져올 나비효과는 얼마나 크고 위협적일까?
누군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상스러움과 공격성마저 인간의 것이라 반박할 수 있다. 우리의 본성으로서 인류 역사에 새겨진 나이테 같은 것이라면 완전히 없애자는 쉬운 소리는 하지 않겠다. 다만 정도(程度)를 생각해보는 것은 필요하다.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 등장해야 적절하며, 그것의 강도는 어느 정도가 충분하냐는 것이다. 이것은 정도(正道)를 정의할 수 없는 영원한 문답이겠지만 그러한 이유로 인류에게는 필연적인 담론이 될 것이다. 화면 안쪽에서의 폭력의 고조는 화면 바깥에서도 동시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니까.
[서지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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