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책장에 자리한 시집을 소개합니다 [도서/문학]

시절을 기록하는 역사가, 시인
글 입력 2024.05.1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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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절을 기록하는 역사가입니다.

 

시의 언어는 리듬이 되어, 때로는 발칙한 상상력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죠. 팍팍한 일상에서 절제된 언어만 마주하다 보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굳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란 시를 읽는 순간, 마음은 말랑해져요. 마치 슬라임이 된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며,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감정들이 고개를 들죠.

 

이번에는 제 책장에 자리한 시집 몇 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작품들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긴 언어들로 가득 차 있어요. 여러분의 마음에도 이 시집이 가닿아, 따뜻하게 녹아내릴 수 있길 바랍니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1991)시인은 「여행자」에서는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고, 「질투는 나의 힘」에서는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노라'라고 막막한 현실 속 괴로운 자아를 고백합니다. 전반적으로 그의 시에는 외로운 청년이 상처에 짓눌리는 과정이 여과 없이 서술되죠.

 

청년의 상처는 소년기의 가난이자 가족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입니다. 쓰러진 아버지를 원망하고 그런 아버지를 챙기는 어머니를 못마땅해하고 생계를 위해 공장으로 출근하는 누이의 선택을 슬퍼해요. 마지막 시 「엄마 걱정」에서 어린 시인은 빈방에서 훌쩍이던 시린 내 유년의 기억을 소환했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음을 내주었던 시간을 찾으려 헤맵니다. 과거를 아파하고 동시에 그리워하죠.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 시인은 아픕니다. 미인은 아픈 그의 곁에 머물죠. 이마에 손을 대보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같이 여행도 갑니다. 나를 신경 써 주는 사람, 그것은 잊어버린 유년의 상처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 꾀병에 걸린 아이처럼 재밌기만 한 세상이 어느 순간 상실과 외로움으로 가득해져요.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는 일, '너'라는 대상을 생각하는 일, 건네고 싶은 말들이 몽글몽글 입안에 피어오르는 일. 모든 일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생깁니다. 외로움과 아픔은 더욱 그런 것 같아요. 그건 스스로 병에 걸리고 타인에게 치유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를 보듬고 싶은 마음을 배워가는 상태이죠.

 

고은강 외 49명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문학동네, 2017) - <문학동네시인선 100>은 기념 티저 시집입니다. 50여명의 시인이 시 한편과 함께 시가 탄생하게 된 이야기를 산문으로 풀어주죠.

 

우리나라에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시인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최근에는 제 또래의 젊은 시인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들의 색을 입으니 꼭 맞춤양복을 주문한 느낌입니다. 괴롭다, 외롭다, 슬프다, 혼란스럽다 등 키워드가 되어버린 아픔이란 감정은 시가 되었어요.

 

그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버젓이 두 발로 이 땅에 서 있다고 외칩니다. 생명이 태동하는 목소리 같죠. 모든 시인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책장에 그들의 이름이 전시되어 있어요. 아직 태어나지 못한 목소리들이 가슴 한 켠에 남았습니다.

 

이제니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현대문학, 2019) - 시인은 전작에서 시를 쓰는 행위, 고뇌와 희망, 단어를 고르고 배치하는 과정을 얘기했습니다. 이번에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오래전 풍경을 그리죠. 그는 에세이에서 "문장이 발생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공간, 그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수록된 시를 모두 읽고 에세이를 읽으면 제목처럼 '있지도 않은 문장이 왜 아름다운지'를 느낄 수 있어요. 에세이는 시인이 말하는 해석인 셈이죠. 오래전 그 날로 돌아가 보았던 바다, 탁아소로 향하는 길, 그곳에서 만난 어딘가 그늘진 아이들, 공작까지. 풍격이 파노라마처럼 흩어집니다. 풍경은 시간 속으로, 존재했던 마전(田)으로 향해요. 쓰고 싶었던 보이지 않는 그늘은 마전에 대한 기억이었죠. 그 곳은 시인을 만든 장소입니다.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 - 섬에서 시인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씁니다. 편지에는 당신 때문에 떠나왔는데 여기서 당신을 더 모르게 되었다는 슬프고도 발랄한 투정이 담겨있죠. 그 마음은 쨍한 햇빛에 잘 말린 빨래처럼 기분 좋은 운율이 됩니다.

 

1부에서 4부까지 제주의 자연이 그의 마음을 대변해요. 동쪽에서 서쪽으로 종달리에서 하도리로 장소를 바꾸어도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거라는 믿음이 광활한 풍경처럼 올곧게 펼쳐집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답장이 없고 시인은 슬퍼 눈물을 흘려요. 눈물은 새싹 같은 여린 마음을 성장시키는 영양분이 됩니다. 한편으로 그런 마음이 부러워 시인의 슬픔에서 자꾸 해사한 웃음을 보았습니다.

 

싱그럽고 청량한 여름의 미소가 시에 배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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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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