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가 불가해한 악에 대한 공포를 응시하는 방식 [영화]

<지옥의 묵시록>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1979)
글 입력 2024.03.13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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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공유된 역사적 트라우마를 영리하게 다룬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장치로써 활용되었으나, 분명하게 확언되지는 않는 악(惡)에 대한 묘사가 더욱 특징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사실 <파묘>를 본 바로 다음 날 <지옥의 묵시록>을 본 순전한 우연에 의해 두 영화를 병치하여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성에 잠재된 어떤 일면이 전자에서는 이미지로 머무는 반면, 후자는 암전 속으로 멈추지 않고 항주해 들어가 완전히 침몰하는 영화적 체험을 강구한다.

 

<지옥의 묵시록>은 악몽을 헤매는 것인지 기억을 더듬는 것인지 모호한, 환영과 같은 시퀀스로 시작된다. 처음 보이는 것은 고요 속에 놓여 있는 밀림의 픽스 샷이다. 그 위로 먼저 헬기 날개의 소리가 들려오다가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오르고, 헬기가 극단적인 근경에서 지나가더니 이내 화염이 밀림을 집어삼킨다. 프레임이 같은 샷 크기를 유지하며 일정한 속도로 오른쪽 수평으로 이동하여 끝없이 이어질 듯한 느낌을 주는 밀림 위로 헬기가 근경과 원경에서 끊임없이 수평으로 오고 가며, 연기, 화염, 폭발이 계속되다가 그 위로 남자의 얼굴, 천장 선풍기, 신상(神像)이 화면을 뒤덮듯 오버랩된다.

 

디졸브로 남자가 누워있는 방 안의 현실로 완전히 넘어오기까지, 처음 제시된 밀림의 모습과 유사한 프레임의 픽스 샷이 상당 시간 겹친 채로 제시되다가, 처음으로 분명한 컷 전환과 함께 보이는 것이 천장 선풍기가 달린 방의 모습과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사이공의 거리 풍경이다. 남자는 안전한 방 안에 있지만, 깨어있는 채로 악몽을 꾸듯 기이한 행동을 계속한다. 바로 옆에 의자를 두고도 바닥에 쪼그려 앉고, 속옷만 입은 벌거벗고 휘청이는 몸으로 무도를 단련하며, 그러다 거울을 깨서 손에 흐르는 피를 얼굴에 마구 문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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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가 돌아가는 방의 침대 위에 누워서도 귓전에 울리는 야만의 소리에 삼켜지는, PTSD에 시달리는 군인. 주인공 윌러드 대위는 이내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불건전’한 발언을 하며 보고 없이 처형을 일삼는, 정신 이상이 의심되는 커츠 대령을 제거하는 임무이다. 임무를 내리는 장군은 ‘선과 악, 합리와 비합리, 모든 경계가 흐려지는 전쟁 상황에서 임계점을 넘어 미쳐버린 인물’로 커츠 대령을 묘사하는데, 흐려진 경계를 말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장군은 선명한 선을 긋고 있다.

 

분명한 위계의 꼭대기에서 상명하는 태도, 절도 있는 식사 매너, “본성의 천사”를 상정하는 사고방식이 그의 앞에 분명하게 그어진 경계를 드러낸다. 반면 커츠 대령이 정신 이상자라는 것에 동의한다며 임무를 받아들이는 윌러드의 귓전엔 또다시 헬기 날개 소리가 울린다. 윌러드는 ‘한계선’을 넘어간 커츠 대령과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지 못한 채로, “그를 찾으면 어떻게 할지 확신이 없”는 채로 그를 찾아 베트남 전쟁의 한가운데를 종단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바그너의 오페라곡과 함께 베트콩 아래의 조용한 마을을 웅장하게 학살하고는 유쾌하게 서핑할 파도를 찾고 네이팜탄을 승리의 냄새로 표현하는 킬고어 중령의 이미지가 이 영화의 관객이 베트남 전쟁 속으로 함께 내딛는 첫걸음이다. 과도한 웅장미는 전쟁 영화에서 흔히 표현되는 승리의 영광의 비틀린 상을 시작점으로 표시하곤, 이내 배는 넝강을 따라 사명을 잊고, 윤리를 내려놓으며, 체계가 무너지고, 환각 상태를 헤매는 전쟁통의 인간들 사이로 침잠해 간다.

 

혹시 기억나는 꿈속의 인물이 있는가? 그가 말도 안 되는 기행을 저지르거나 설명할 수 없는 모순적인 특성을 보이진 않던가? 비합리적인 꿈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니고, 우리는 그런 비합리성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윌러드는 넝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마치 악몽 속에서 헤매는 듯, 어떤 비합리를 목격하든 시종일관 거리를 두는 태도를 유지한다. 관객들은 계속해서 연기나 안개로 희뿌옇게 시야가 흐려지며, 암전과 섬광이 반복되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 어렵게 하는 화면으로 인해 혼란 속으로 함께 빠져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심리적인 이상을 강렬하게 표출하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윌러드는 어떠한 자기표현도 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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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당도하여 커츠 대령을 마주한 이후로 윌러드 대위가 거치는 과정은 마치 종교 의례를 치르는 것처럼 묘사된다. 수많은 머리가 제물로 바쳐진 사원에 신도들의 인도를 거쳐 들어서게 되고, 커츠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실루엣으로 처음 얼굴을 드러낸다. 신이 그러하듯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커츠의 무자비한 보살핌 아래 고행을 거친 뒤 윌러드는 순례를 거쳐 신의 뜻을 현현할 성인으로 거듭나는 듯하다.

 

커츠의 뜻을 따라 처음으로 형형한 눈빛을 띤 야만의 얼굴을 한 윌러드가 제의에서 소를 신성하게 도륙하듯 커츠를 살해하고, 마지막 숨으로 그는 "공포(Terror)"라는 말을 내뱉는다. 이윽고 숭배하는 신도들 사이를 헤쳐 사원을 떠나는 윌러드의 위로 다시 화면들이 겹치며 오프닝 시퀀스를 연상시키는 다중 디졸브가 시작되고, '공포'라는 반복되는 속삭임과 함께 마침내 윌러드의 얼굴이 신상에 완전히 흡수되는 듯한 디졸브 끝에 신상의 반쪽짜리 얼굴만이 암전 속에서 드러나는 컷으로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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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츠의 사원에 윌러드가 당도한 뒤의 과정을 공들여 묘사함으로써 <지옥의 묵시록>은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악의, 공포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전쟁 가운데 일어나는 비인간화의 추동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고 의견을 표명하는 일은 손쉽지만, 연기처럼 앞을 가리고 섬광처럼 눈을 멀게 하는 공포를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다면 그 불가해한 악에 대해 무슨 의미 있는 언명이 가능하겠는가? 계시이자 환청과도 같은 커츠의 말들 속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위상에서 이해되는 말은 안전한 선 안에서 전쟁을 주도하고 감히 윤리를, 사명을, 영광을 논하는 기만에 대한 질타였다. 지금도 지구의 어느 곳에선 전쟁이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악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는가. 감히 무엇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하는가.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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